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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권리

8. 1985년 5월 12일

by 글마중 김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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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마불 세계여행 에티오피아 수리부족


오전 9시. 신경과 과장이 주치의와 인턴 여럿을 데리고 회진 와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병원에 오래 근무하면서 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과 종종 맞닥뜨리곤 합니다. 혈압이 급속도로 상승하면 100% 사망하는데 K 환자는 기적적으로 멈추었어요. 서른아홉 젊은 나이가 생명을 유지하지 않았나 추론해 봤지만 기적을 일으킨 경우로 결론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 될 확률이 90%지만 이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너는 축제를 만난 것 같았다.


교직원들은 시간별로 팀을 짜서 병문안을 왔다. 너는 기쁨에 들떠 중환자실을 들어서는 오전 팀 선생들에게 K가 생명에 지장 없다는 말을 전했다.


선생들은 고무 튜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혼수상태의 K와 다 나은 듯 환호하는 너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는 그런 선생들에게 여러분이 염려해 준 덕분에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며 이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선생들은 전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네가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살짝 미친 것 같다고!


오후에 진단서를 제출하러 학교에 갔다.


교정 가득 밝은 햇살이 쏟아졌고 운동장 여기저기서 학생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K가 없어도 학교는 여전했다.

너는 그 사실이 몹시 슬펐다.


10년 동안 K는 최우수 교사로 교육장과 교육감 표창을 몇 차례 받았고 인기 1위 교사였으며 3학년 주임을 2년 연임하며 학력경시대회 수석을 두 명씩 4명이나 배출했다.


학교에서는 3년 연속 학년주임을 맡기면서 차기 교감 후보로 내정했다.


K가 너에게 하소연했다. 지쳤다고. 도무지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겨울방학 끝 무렵 K와 너는 기품 있는 경상을 사 들고 학교장 사저로 찾아가 체력에 한계가 온 것 같다며 학년 주임을 맡기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평소에 K를 아끼던 학교장은 흔쾌히 그러겠다며 다음 해에는 꼭 맡아달라고 했다.


개학 날 학교에서 돌아온 K는 풀이 팍 죽어 있었다.

학년 주임을 또 맡긴 것이었다.


학교장은 미안해서 쩔쩔매며 이렇게 변명했다. 3년 연속 수석이 나오면 명문 학교가 되므로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맡겨야 한다는 재단 측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고.


3월 2일 개학해

5월 6일 쓰러졌다.


학교장이 K와 너의 부탁대로 재단 측 의사를 거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K와 나란히 돌나물을 뜯으러 가던 오솔길도 슬프고

나란히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던 시가지 모습도 슬펐다.


K는 이곳으로 돌아와 다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학교!

교무실!

학생들!


돌아서는 너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학교 밑에 있는 집에 들렀다. 아이 셋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텐데 친정어머니는 야무지게 화초를 돌봐 꽃동산이 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녀리라고 무시한 것만 원망했던 어머니가 먹먹할 정도로 고마웠다.


순하디 순한 막내는 꼬박 하루를 울며 굶고 나서 우유를 잘 먹는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1학년 큰아들은 그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3학년 딸은 바짝 여위었다. 또 가슴이 미어졌다.


너는 그날 가족이 모두 불행해진 게 너 때문이라고 뼈아프게 자책했다.


의식불명인 K 앞에서 자꾸 눈물 나면 어쩌나 걱정하며 중환자실을 들어섰다.


K가 눈을 어렵게 떴다. 잔뜩 충혈되어 있었는데 자의로 눈뜬 게 아니었는지 스스로 되감겼다.


너는 K가 눈을 뜬 거라고 믿고 싶었다.

기계적으로 석션기를 집어 들고 가래를 뽑았다.

너는 괜찮아졌다. K가 살아있어서!


오후 8시 저녁 팀 선생들이 병문안을 왔다. 안 선생이 너를 밖으로 불렀다.

“저, 사모님!”

안 선생이 머뭇거렸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세요.”

“처제가 여기 근무하는데 간호사들이 사모님한테 돼지라고 한답니다.”

“네, 왜요?”

“음료수가 그렇게 많이 들어와도 나눌 줄 모른다고요.”

“아-!”


너는 정곡을 찔렸다.

사교성 없고 융통성도 없는 너한테 딱 맞는 별칭이었다.


발이 넓어서 국회의원 할 사람이라던 K였다. 오래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방문객들은 빈손이 아니었다.


K가 중환자실에 있었으므로 입원실이 따로 없었다. 너와 시어머니는 층계참에서 쪽잠을 자고 들어온 선물은 구석에 쌓아놓았다. 방문객을 대접하고 남는 음료는 매일 집과 큰집으로 보내고.


너는 그날부터 수북하게 쌓이는 각종 음료들을 간호사는 물론 의사들과 나누었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네가 불침번을 섰다.


키가 크고 덩치 좋은 K는 자꾸 미끄러져 한쪽으로 쑤셔 박혔다. 안간힘을 다해 끌어올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욕창이 쉽게 생기는 어깨와 엉치뼈 밑에 방석을 받쳤다. 호흡이 거칠어질 때마다 끓어오르는 가래를 제거하고 침대를 뺑뺑 돌며 팔다리가 굳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물렀다.


침대 난간은 네가 지나갈 때마다 젖이 묻어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렸다. 닦으면 그때뿐 조금 있으면 마찬가지였다. 틈틈이 유축기로 짜내고 젖분비 억제제를 과다 복용해도 소용없었다.


밤 2시 30분 주치의가 마지막으로 K를 살펴보고 나갔다. 간호사나 인턴은 30분 뒤에 올 것이다.


보호자들도 자러 가고 중환자만 있는 공간에서 너는 그날의 숙제를 시작한다. 온종일 들어온 위로금 정리였다.


K 침대 머리맡 깊숙이 밀어 넣었던 돈을 헤아려 수첩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물론 지출한 것도.


결혼식 때 너의 친구는 셋이고 K 친구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사진을 여러 번 나누어 찍을 정도였다. K가 사교적이라는 걸 알는 있었지만 이렇게 위로금이 많이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혼수상태인 K 옆에서 남의눈을 피해 한밤중에 돈을 세야 하는 너의 마음은 참 그랬다. 너무 복잡 미묘해서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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