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올해 금오도는
3코스 절경
3월 29일 금오도는 산벚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올봄은 유난히 추워서 개나리꽃밖에 못 봤던 나와 여동생은 신세계를 발견한 듯 기뻐했다.
나무에서 한 번 피고 떨어진 다음 땅에서 또 한 번 피는 동백꽃을 만나러
직포에서 비렁길 3코스 데크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온통 붉은 동백꽃으로 뒤덮여 있는 장관을 보러 왔는데 꽃이 없었다.
해거리 아니면 동백꽃 흉년이 들었는지 없어도 너무 없다.
새벽 5시에 일어나 4시간 넘게 운전해 배까지 타고 온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숙소는 꼼꼼하게 검색한 끝에 해변 산책로가 있고
방에서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영화배우 강하늘이 묵었던 다락방이 있는 예쁜 방에 짐을 풀었다.
산책길은 밭에서 흘러내린 흙으로 지저분했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나라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 두 마리를 본 한적하고 아름다운 산책로 전경이다.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걸 막기 위해 처마 위까지 돌담을 쌓은 집이 신기했다.
집 뒤에는 울울한 소나무 숲이 있어 작은 요새처럼 당당하고 풍족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빈집이었다.
파도와 맞선 노력이 가상해서 그런지 방치하는 것이 무척 아까웠다.
보존 가옥으로 지정해서 관리하거나 어막 체험관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숙소로 돌아와 낭만적인 남해안 노을을 감상했다.
노을은 숭고한 대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어 매번 감탄하게 만든다.
인상 좋고 친절한 펜션 사장님이 밤낚시를 나서며 말했다.
“많이 잡으면 회 떠줄게요.”
우리는 먹을 복이 없는지 한 마리밖에 못 잡았다고 했다.
지나치게 피곤해서 그런지 잠이 안 와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비틀거릴 정도로 어지러워 누워있고 싶었지만 시간이 아까워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가의 희귀식물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기다리다 못해 문을 두드렸다.
이런, 11시 퇴실인데 30분이나 초과한 것이었다.
학동에서 비렁길 4코스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동백꽃이 3코스보다 많이 피어 있었다.
땅에 떨어져 또 한번 아름답게 피는 꽃
만약 4코스조차 시원찮았으면 다시는 금오도를 찾지 않기로 했을 것이다.
옥색 물빛은 먼바다로 가며 하얗게 옅어지다 다시 짙어지는 것이 신비로웠다.
금오도 해안은 경관이 뛰어나 신들이 노는 곳이라 일컬었다고 했다.
4코스 사다리통 전망대에서 시 두 편을 마음에 담았다.
낯선 열매
겹겹이 쌈을 싼 것 같은 신기한 풀
동백꽃을 주워 손잡이 난간에 올려놓으며 학동으로 되돌아왔다.
4년 전에 갔던 맛집 상록수 식당에서 해산물 한 접시와 갈치 조림을 주문했다.
“많이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여천항에서 출발하는 4시 20분 배만 탈 수 있으면 돼요.”
갖가지 나물에 김치와 고동, 거북손, 따개비 등이 담긴 해산물 한 접시가 놓이고 갈치 조림이 끓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거북손, 따개비, 이름 모를 해산물에 젓가락이 먼저 갔다.
쫄깃한 식감과 신선하고 오묘한 바다향이 물씬 풍겨 아주 맛있었다.
모든 반찬이 입에 착착 붙었지만 특히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얼갈이김치였다.
너무 맛있어서 더 달라고 한 뒤 담그는 법을 전수받았다.
손 한번 대지 않은 갈치 조림이 아까워 포장을 부탁했다.
싹싹 비운 접시를 본 여사장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고 포장 손놀림이 흥겨웠다.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며 방풍나물 갓김치 갈치젓 간장게장을 샀다.
천 원도 아까워 벌벌 떠는 우리였지만 책임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름다운 금오도를 감상한 값이라고 하기에는 적었지만 그렇더라도!
17. 30리 퇴근길
내가 결혼하면서 함께 자취하던 여동생은 시골집에서 출퇴근했다. 8시 마지막 버스를 놓치면 십리 산길을 걸어야 했는데 산짐승보다 고개 아래 동네 양아치들이 더 무섭고 위험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차 시간을 핑계로 일찍 퇴근하는 법이 없는 성실한 동생이었다. 간혹 정말 어쩌다 간혹 단칸방인 우리 신혼집도 왔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해했다.
그런 동생에게 수호 카드가 나타났다. 아랫말에 사는 어머니 수양 언니 아들 재호 오빠였다. 오빠는 옷가게에 근무하고 있었다. 동생은 막차를 놓치면 옷가게로 가서 오빠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도회지 길 이십 리 산길 십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무려 6년이나.
언젠가부터 동생은 죽기 전에 오빠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동생은 금오도 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서울로 가지 않고 우리 집에 묵었다. 마음껏 친정 동네 근처의 벚꽃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올 3월 31일 대전 근교는 벚꽃이 하나도 피지 않았다. 우리는 자운대 목련꽃 길을 보고 돌아오며 의견을 모았다.
“이럴 때 재호 오빠 만나러 가자!”
큰 물 건너 오빠네 집이 있는 아랫말로 갔다. 확실하진 않으나 여든 살 가까운 오빠는 사회에서 물러나 시골집에서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동생은 세상 물정을 몰라서 오토바이 기름 한번 넣어준 적이 없었다며 용돈을 준비했다. 오빠네 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커다란 밭이 우리를 맞았다. 열 채 가까운 집 중에서 두어 채만 빼고 전부 현대식 주택으로 증·개축을 해서 깜짝 놀랐다. 고속도로 방음벽 때문에 안 보여서 변한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시골이니까 변동은 크지 않으리라 믿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잔디가 잘 가꾸어진 어느 집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물었다.
“혹시 이재호 씨네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
“우리는 이 동네 산 지 10년밖에 안 돼서 잘 몰라요. 저 위에 원주민 두 집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어보세요. 지금은 하우스로 일하러 가서 아무도 없고 저녁때 돌아올 거예요. ”
동생은 섭섭함을 금치 못하며 발길을 돌렸다.
“실망하지 마. 다리 건너 가겟방에 가서 물어봐도 되잖아.”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원주민이 산다는 골목으로 올라갔다. 얼른 차에서 내려 뒤쫓아갔다더니 중년 부부가 내렸다. 여동생 이야기를 듣고 난 부인은 달갑잖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땅 보러 다니는 아줌마들인 줄 알았어요. 이재호 씨한테 어디 살던 누가 찾는다고 할까요?”
“텃골 부녀회장 작은딸이라고 하면 알 거예요.”
부인은 우리 어머니를 잘 안다며 금방 상냥해졌다.
“바쁜지 안 받네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장사하니까 가게로 직접 가 보세요.”
시장통이라 즉시 견인한다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있어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빈 가게 앞을 찾아 간신히 주차했다. 우리 어머니와 오빠 어머니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기에 어머니 생각이 나서 오빠 가게로 달려갔다. 가게를 들어서던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동생과 오빠가 반가움에 겨워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 안에서 그냥 기다릴 걸 괜히 왔다. 하지만 직원이 나를 봤기 때문에 그냥 가버리는 것도 그래서 큰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오빠는 여동생을 안았다 놓기를 반복하며 울고 있었다. 격정에 휩싸인 오빠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 그때 첫 아이 낳은 유부남이었지만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했어. 정말 사랑했었어. 너무 예뻐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선을 넘으면 안 되잖아. 이젠 일흔여섯이나 되었으니 마음 놓고 안아 보고 싶어. 그래도 되지 안 그래?”
키가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원시원 서글서글한 여동생은 미스 충남 선발대회에 참가하라고 단체의 추천받기도 했다. 여동생은 순수하게 퇴근시켜 준 은인이라 여겼지만 남자인 오빠는 달랐던 것이었다. 이럴 땐 내가 망가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오빠, 내 동생 안 덮어 먹어서 정말 고마워요. 오빠가 참아줘서 둘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거예요.”
안부와 그 말만 하고 주차 단속을 핑계 삼아 먼저 자리를 떴다. 차로 돌아와 곰곰 생각할수록 오빠가 고마웠다. 만약 오빠와 여동생한테 무슨 일이 있었으면 욕심 많은 우리 어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빠 가정을 깨트리고 여동생과 결혼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빠 아내와 아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여동생은 결혼한 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한 제부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오빠 역시 착실하게 가게를 운영해 시골에 땅도 많이 사고 신보다 더 높은 역 앞의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었다.
18. 생명의 힘
틈새에 내렸던 뿌리
작년부터 베란다에 애플민트를 키웠다.
간장게장 국물에
생강을 저며 넣고 달인 맛간장을
두부에 끼얹고 애플민트 싹을 꽂으면
맛과 모양이 훌륭한 요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제 물청소를 하려고 화분을 옮기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힘껏 잡아당기니까 주르륵 뿌리가 뽑혀 나왔다.
모노륨 장판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넓게 퍼진 것이었다.
식물도 이럴진대
사람은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모양새로 얼마나 피나는 노력들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