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산책길에서
백수 주제에 토요일은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마냥 쉬고만 싶다.
이 무슨 궤변인지 모르지만.
건널목 건너면 바로 공원.
말 그대로 지척이 천리다.
며칠 전 피지 않아 못 찍었던 꽃 사진을 찍자며
게으른 몸과 마음을 살살 꾀었다.
이불속을 뒹구느라 산발했던 머리를 빗고
산송장 같은 얼굴을 정상인 비슷하게 보이도록 가벼운 색조 화장으로 변장했다.
아파트를 나서자마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를 스쳐온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집안에 있었으면 맞지 못했을 자연의 선물이다.
공원 오르막 계단에서 발을 멈췄다
민들레 홀씨와 씀바귀 꽃
싱그러운 애기나리꽃도 보고 나오기를 참 잘했다.
붉은 병꽃나무도 꽃이 활짝 피었다. 더 게으름 피웠으면 못 볼 뻔했다.
아카시아 꽃도 피기 시작했다. 만개하지 않아 향기는 아직!
매실이 맺혀 저만큼 커졌다.
열흘만에 찾은 공원은 다른 세상이 되어있다.
운동을 끝내고 마트로 장을 보러 가다가 백화점 광장에 다시 한번 반했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왠지 신나는 일이 한바탕 벌어질 것 같아 설렜다.
지난 금요일 공주로 산나물 뜯으러 갔던 사진을 보니 또 가고 싶다.
이름 모를 하얀꽃
뱀딸기 꽃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오랜만에 만난 할미꽃
20. 내가 아는 캣맘
남편과 나는 실개천이 흐르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유독 강변 드라이브를 좋아한다.
드넓은 강 저 아래까지 아득하게 흐르는 물을 보면
너그러움과 풍요가 일렁이는 것 같아 이루 말할 수 없이 흐뭇했다.
우리가 즐겨 찾는 곳은 탑정 저수지
익산 용안 금강 둑 바람개비 마을
신성리 갈대밭이다.
수채화 같은 봄에는 ‘머리 감은 수양버들 거문고 타고’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른다.
작열하는 햇빛이 반사하는 여름 습지의 연꽃에 홀딱 반하고
가을 갈대밭에 부는 바람은 잊고 있던 외로움을 기지개 켜게 했다.
겨울 강에서 만나는 철새는 세상의 지평을 열어준다.
계절과 바람이 난 나는 집에 가서 밥하기 싫어
연산에 있는 찐빵 가게에 들러 찐빵과 만두를 샀다.
찐빵 가게 여 사장님은 손이 크고 나누기를 좋아했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새침한 나까지 바꿔 놓았으니 말해 무엇하랴?
바쁜 일이 겹쳐 오랜만에 강변 드라이브를 했다.
사장님이 오늘 오면 참 좋겠다 싶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손님이 주문해서 쑥송편을 빚었는데 몇 개 남아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더 줄 게 뭐 없나. 아 참, 보리밥 줄까요?”
“웬 보리밥요?”
“혼자 있으니까 밥 안 해 먹는다고 동생이 한 소쿠리 가져왔어요.”
전라도가 고향인 사장님 김치 맛을 아는 나였다.
“보리밥 주려면 맛있는 열무김치도 주셔야 하는데요?”
염치를 팔아먹은 나는 맛있는 열무김치까지 챙겼다.
차 앞으로 고양이 두 마리가 와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허허허! 남편이 웃으며 고양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몇 마리 없네요?”
“며칠 전에 두 마리가 새끼 낳고 들어앉아 있어서 그래요. 신기하고 예쁘면서도 사료값도 만만치 않고 며칠 지나면 여러 마리가 몰려다닐 거라 큰 걱정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길고양이한테 밥 준다고 나를 원수 대하듯 하거든요.”
고양이를 쓰다듬는 사장님 표정이 어두워 나도 마음이 언짢았다.
맨 처음 찐빵을 사러 갔을 때였다.
찐빵 가게 옆 벽면 받침목과 기둥을 따라
고양이 서너 마리가 오르내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어머 사장님이 키우시나 봐요? ”
“길 고양인데 밥을 줬더니 저렇게 가게만 맴돌아요.”
“너무 귀여워요.”
“귀엽다니까 마음이 놓여요. 손님들이 싫어할까 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거든요.”
처음 고양이들은 서슴없이 가게 안팎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사장님은 고양이들을 모아 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타일렀다.
“너희들이 가게 안을 돌아다니면 손님들이 비위생적이라고 흉보고 다시는 안 와. 손님 떨어져서 장사 안되면 너희들 사료 살 돈이 없는 거야. 나도 살고 너희도 살려면 밖에서만 놀아야 해. 알았지?”
그 후 고양이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베푸는 사람은 고양이도 좋아하고 아끼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강변 나들이 때 준비할 선물을 결정했다.
21. 살구가 왔어요
내가 자란 산골 작은 마을에는 살구나무가 딱 한 그루 있었다.
느티나무만 한 나무에 주렁주렁 살구가 맺히고 나날이 익어갔다.
살구나무 주인 딸은 살구 철이 돌아오면 목에 힘을 주고 거만해졌다.
나도 또래들처럼 그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 무진 노력했다.
세월 따라 기억이 왜곡되어 확실치는 않지만 두세 개 얻어먹었던 같다.
6.25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 된 궁핍한 산골.
감동적인 살구 맛은 지금까지 생생해서 살구만 보면 어쩔 수 없이 사들고 온다.
매번 맛에 실망하면서도.
사흘 전 지나는 길가 좌판에 살구가 눈에 띄었다.
작고 단맛은 적었지만 뜻밖으로 살구향이 풍부했다.
이튿날 정오 무렵 운동을 마치고 또 사러 갔다.
장사가 없다.
너무 일러서 그런지 어쩐지 아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