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가치는 <자유>에 있다
2018년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David Goodall, 1914~2018) 박사는 104세의 나이로 안락사를 했다. 마지막 성명에서 "생명의 가치는 길고 짧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늙어서 자기 수족을 타인에게 의탁해야 함은 구속이고 그전에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는 게 <자유>이다라는 말일 거다.
니체의 말처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위버멘쉬(超人)이고 승리자이다.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구설이 많은 죽음이긴 하나 구달박사의 안락사로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차이는
존엄사(尊嚴死, Death with dignity): 연명치료를 중단하여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고 마지막을 품위 있게 마감하는 것이고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 의료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약물등으로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하는 죽음이다.
존엄사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의 존엄을 위해 연명을 거부하는 죽음이고
안락사는 아직 불치병이 없는 사람이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명의 결정권을 갖고 삶을 마감하는 죽음을 말한다.
안락사가 죄가 되는 것은. 생명은 神만이 중단시킬 수 있다는 종교적 교리의 영향과 사회적으로 경제적 약자가 자천 타천으로 압박을 받아 안락사가 늘어날 수 있다는 <미끄러운 경사면, slippery slopor> 이론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도 스위스등 일부 나라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어 있으나 점차 확대되어 가는 추세이다.
<죽음의 미학>이라고 하면 과언이 될지 모르나 탄생만큼 죽음(자연사)도 축복받아야 하는 행사라고 생각한다.
사고사나 불행한 사망을 희화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애도해야 함이 당연하다. 단지, 구달박사처럼 더 이상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스스로 판단했을 때, 이 결정이 죄가 되느냐는 별개의 사안이다. 구달박사는 마지막 순간에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웃으며 생을 마쳤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죽음의 미학은 자기 결정의 문제와 닿아 있다. 고통의 연장보다 품위 있는 마무리를 선택하려는 태도는, 삶을 능동적으로 살았던 방식의 연장선이다.
죽음은 개인의 시간은 끝나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는 재구성된다. 망자가 남긴 삶의 흔적은 농도에 따라 작품처럼 기억된다. (가장 최근에는 안성기의 영면이 그렇다)
죽음의 미학은 죽음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삶을 성실하게 마무리하는 방식을 사유하는 일이다. 끝을 의식할 때 삶은 더 또렷해지고, 그 또렷함 속에서 아름다움은 생긴다.
마지막 삶에 초연하지 못해 집착하는 모습은 공감은 가나 안쓰럽다.
아름다운 이별은 그리움과 추억을 주위사람들에게 선물하고,
남은 사람들은 상실감을 갖겠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교차하게 한다.
품격 있는 죽음은 내가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kr.Pinteres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