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평등한 것은 인간의 가치이지 삶은 아니다
線을 넘지 않는 幸福
살면서 언제 인가부터 자족할 줄 아는 삶을 생각하고 있다. 내 나이 50 초반까지도 일에 대한 욕심,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러나 중반을 지나면서 내 능력의 한계도 서서히 느끼면서 한 계단 더 높은 삶은 포기하였다.
역설적이게도 포기를 하고 한계범위를 설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이 느껴졌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만족(욕심에 꽉 차는-睕완)이 아닌 자족(모자라지만 족한-嗛협)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생상 영원한 만족은 애초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앞을 볼 때의 눈은 정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15도 위를 쳐다본다고 한다. 항상 정면보다 위를 쳐다보게 된다. 지금의 처지에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더 잘 살고 싶어 한다. 불행은 비교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빈부구조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이 부자가 되기는 정말 어렵고 이런 구조는 앞으로도 별로 바뀔 것 같지 않다.
끊임없이 도전은 하되 능력의 임계점(臨界點)을 스스로 정확(精確)하게 아는 것이 행복의 척도이다. 사람이 평등한 것은 인간의 가치이지 삶은 아니다.
이 세상에 날 때 삶의 선은 어느 정도 정해진다고 본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부자가 되는 것은 부잣집 아이가 가난해지는 것보다 정말 어렵다. 요즘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선을 넘지 않는 행복> 이것이 답이다. 사실 살면서 선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사람은 다른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상의 것을 꿈꾼다.
이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겸손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잘 살고 싶다는데 겸손이 무슨 소용인가. 단지 행복에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의 능력을 알고 인정하는 것, 이것이 선(線)이다.
사람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섬에 갇혀 혼자 살게 되면 최소한의 의식주가 행복의 척도가 되겠지만 두 사람 이상의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히 비교라는 걸 하게 되고 비교를 통해 행복의 척도(尺度)가 정해진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잠재적 본성이다.
특히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층계 별로 세분화되어 있는 사람 간의 線은 넘어서기가 진짜 힘들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은 생각 안 하고 힘들게 불행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부모의 능력도 자신의 능력임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하게 이 선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살아온 사회와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보다 몇 배의 적응 노력을 해야 한다. 이래 저래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행복은 먼저 자신의 線에 만족하고 남을 위해 善을 베푸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본래 동물적 利己를 가진 사람이 남을 생각하는 利他를 행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이타도 자기가 편안함 속에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춥고 배고픔 속에서의 이타는 사랑을 제외하면 善이 아닐 수도 있다.
진정한 이타는 오직 모성애뿐이다. 그 이외의 이타는 자기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하기 위한 또 다른 이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모성애만이 걸림이 없는 사랑이라는 거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족의 삶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선을 정해 두고 그 선 안에서 즐길 줄 아는 智慧, 이것이 <線을 지키는 삶>이다.
풍초해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