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길 직관의 길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by 풍초김해수




경험의 길 직관의 길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오랫동안 불교계에서 논쟁을 하고 있는 화두이다. 고려 때 지눌선사가 돈오점수를 주창(主唱)한 이후 800년 동안 변하지 않던 논리를 근자에 와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스님이 처음으로 이 논리를 반박하여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다.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도 계속 정진하여 수행을 하면서 스스로의 근기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 점수논쟁이라면 한번 깨달으면 직입여래(부처가 됨) 한다는 것이 돈수논쟁이다.


범부의 소견으로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잣대가 평생 수행을 업으로 삼은 스님들과 일반 사부대중과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붓다가 수행방법으로서 팔정도를 제시하였기 때문에 점수가 맞을 수도 있겠지만 붓다가 일반대중들에게까지 어려운 수행을 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


붓다의 목적이 일반 대중은 당시 사후영혼설에 혹세당하지 말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길로 가기를 원함이니 돈수(頓修)를 , 스님들은 대중에게 전법을 하기 위해서 혹은 스스로의 진리탐구를 위해서 점수(漸修)를 권하였을 것이다라는 게 나의 추론이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경우에 처했을 때 해결해 나가는 방법으로 사안을 조밀하게 천천히 살펴가면서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해결하는 사람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단박에 직관으로서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마음이 용렬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계속 지속적으로 청정한 마음이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정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漸修이고 깨달음 자체가 붓다의 참구(參究)이니 일단 붓다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목적이 이미 수행되었다는 의미로 더 이상의 탐구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頓修이다.


이 논쟁의 시작은 당나라 때 초조인 달마가 禪수행법을 제시한 이후 5조 홍인대사의 수제자인 신수와 말단행자인 혜능의 점수와 돈수 논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수와 혜능은 다 같이 5 조홍인대사의 제자인데 신수가


身是普堤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幕便有塵埃


몸은 보리수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를 없게 하라

(신수:북종선)-돈오점수


라고 하였고 이에 혜능은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淸淨

何處染塵埃


마음이 보리수고 몸은 명경대다

맑은 거울은 본래 청정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랴

(혜능:남종선)-돈오돈수


라고 하였다.


돈오점수는 홍인대사의 수좌인 신수의 주장을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가 받아 전래되어 오다가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지눌선사가 선종과 교종을 회통시키면서 전개하여 800년 동안 조계종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다.


돈오돈수는 "최상승선법은 일초직입여래지라(한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이른다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퇴옹 성철스님이 처음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깨달음 뒤에는 계속 수행할 필요가 없다, 아니면 깨친 후에도 계속적인 수행을 통해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차이인데 어느 것이 이 세상의 이치에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저마다 다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당나라 현장법사를 만나러 가던 중 해골 물을 마신 일화는 유명한데 이때 원효가 가던 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온 이유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였다고 생각한다.


돈오점수라면 가던 길을 가면서 몸으로 체득하고 느끼고 습련(習練)을 통해 점수(漸修)를 하여야 함에도 원효는 어제 마신 물과 오늘 마신 물이 다르지 않은데 느낌이 다른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만물일체유심조의 원리를 깨닫고는 돈오각성 하여 사실상 부처의 반열에 올랐다. 원효는 돈오 후 바로 귀국하여 무애사상과 화쟁사상을 주장하면서 저작활동과 대중교화에 힘썼다.



얘기가 조금 길어졌는데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돈오점수나 돈오돈수가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사안마다 경험을 통해 가지와 잎사귀를 모두 보고 나서 인식하는 사람과


가지와 잎사귀는 보지 않고 뿌리와 줄기만 보고 사안을 직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나뉜다는 거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그렇지만...... 하인리히가 말했다.

바로 그런 세속을 초월한 드높은 학문이 인간사를 공평무사하게 인도하는 그런 일에 쓰여야 하지 않나요? 어린애처럼 구김이 없는 바로 그런 소박함이 우리의 세속적인 일들의 미로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훨씬 더 확실하고 올바른 길을 알려주지 않을까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느라 길을 잘못 접어들기도 하고 비틀대기도 하며, 수없이 나타나는 우연과 얽히고설킴 때문에 눈이 부실 지경인 영리함보다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라는 학문에 도달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는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힘겹고 수없이 꾸불꾸불한 길입니다. 즉, 경험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번만 팔짝 뛰면 되는 길입니다. 즉 직관의 길입니다.


첫 번째 길을 택해서 가는 사람은 힘겹게 계산을 해서 하나에서 다른 것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반면에 두 번째 길을 택해서 가는 사람은 모든 사관과 대상의 본질을 즉각적으로 투시하고, 그 본질을 다각도로 생동감 있게 고찰하고, 그러한 본질들을 석판화에 그려진 인물들을 비교하듯 어렵지 않게 다른 것들과 비교할 줄 알지요."


노발리스의 <푸른 꽃>34page 인용







2016-5-14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풍초김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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