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바치는 思父曲

아버지는 나의 기준점이 되었다

by 풍초김해수



아버지는 온돌방 구들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항상 옷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했었다. 전쟁 직후 부산에는 꽤나 분주했다. 피난민들로 북적거릴 때라 국민학교 한 반 학생이 80명에 오전반 오후반이 있을 때였다. 검정고무신에 '책보'라는 보자기에 책을 싸 다닐 때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셔서 자식들에게는 운동화와 책가방을 사 주셨다. 육성회비도 제 때 주셨다. 돈을 제때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앞에 불려 나가 창피를 당하고 어떤 때는 손바닥을 때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12살 때 돌아가셨다. 사남매의 맏이셨던 아버지는 홀로 된 머니와 동생들을 건사하느라 12살에 소년가장이 되셨다. 시골에서 학교에 갈 형편이 안돼 독학으로 한학漢學을 공부하셨다. 그리고 자식들 공부 때문에 경남하동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고 자식들을 위해 흙노동을 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나는 부끄러워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당당하셨고 문중이나 동네회의를 하면 주도를 했고, 솔선수범 하셨으며 다른 사람과 시비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동네에 나가면 어른들이 "너희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다"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겐 엄격하시면서도 가슴은 따뜻한 그런 분이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고로 환갑을 못 채우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어릴 때 부끄러워했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빌고 있었다. 며칠 있으면 아버지의 기일이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다. 이제는 아버지가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게 살다 가야 한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를 훌쩍 넘겼지만 아직도 아버지만 한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이제라도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아버지가 내가 사는 기준점基準點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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