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만나서 또 하나의 생명을 낳는 것. 그 행동에 수반되는 소중하고 가치로운 것들이 무수히 담겨 있으리라. 그 소중함은 사랑과 책임과 돌봄과 베풂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내포한다. 그것들이 동반되지 않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마치 아무런 자격도 없이 누군가를 가르치려 덤벼드는 것이요. 어둠의 구덩이로 몰고 가는 어둠의 창시자가 아닐까. 물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시작부터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일 수 있고 누군가 처음으로 하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무게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 부모임을 포기하고 생명을 쏟아내는 일에 집중하며 소중한 생명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부모가 있다. 영화 가버나움 속 자인의 부모이다. 가버나움 영화가 시작되면 의사가 한 아이의 입을 벌리고 유치가 다 빠졌다고 하며 대강 열두 살 또는 열세 살 정도라고 얘기한다. 그 아이는 바로 영화의 주인공 자인이며 지금 교도소 수감 중이다. 그런 자인이 교도소에서 생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고, 부모를 고소한 재판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충격적인 이 영화의 시작에서 자신의 나이도 정확히 모르는,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서 겨우 열두 살 정도라고 변호사가 말을 한다. 그때 판사가 자인에게 왜 부모를 고소했는지 물어본다. 자인은 자기를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얼마나 기막힌 말인가? 이 땅에 자기를 태어나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다니 일견 충격적인 자인의 이 말은 자인이 왜 그랬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레바논의 빈민가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과 인권이 유린된 채 아동학대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노와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그 밑바닥 삶에 있던 자인은 영화 후반부에서 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은 똥 같고 아니 신발보다 더 못한 거지 같은 인생이었다고 말한다. 고작 12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싶은 그 말은 과연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못할 정도로 자인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이 영화 내내 그려진다.
12살 정도의 장남인 자인은 무능력한 아버지(특별히 어떤 일을 하는지 나오지 않는다.)와 많은 아이를 낳고 담배를 즐겨하는 어머니 밑에서 많은 동생들(대략 7-8명 정도)을 거느리며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학교에는 가본 적이 없는 그는 거짓말로 사 온 약을 빻아 옷을 세탁하는 일, 주스를 파는 일, 그리고 건물주인 가게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로 쉴 틈이 없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부모로부터의 욕이고 폭력이며 배부르게 먹지 못할 뿐 아니라 동생을 돌보는 일들로 편히 잠도 자지 못한다. 그런 자인에게 가장 애정을 가지고 지켜주고 싶었던 11살 동생 사하르가 있었다. 초경을 시작한 사하르를 걱정하며 자인은 사하르와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사하르는 닭 몇 마리에 건물주인과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된다.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사하르와 그것을 말리는 자인을 뒤로하고 부모가 강제로 사하르를 시집보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자인은 집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공원에서 만나게 된 라힐과 그의 아들 요나스와 함께 하게 된다. 라힐은 에티오피아 사람으로 불법체류자다. 어느 부유한 집안에 가정부로 있었는데 그곳 경비원과 아이를 갖게 되어 나오게 되고 공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다가 자인을 만나게 됐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인을 거두며 요나스를 그에게 맡긴다. 무엇보다 라힐은 몰래 아들을 키우면서 거짓으로 신분증을 만들어 일하고 있기에 체류증을 연장하기 위한 많은 돈이 필요하다. 자인에게 요나스를 맡기고 어렵게 돈을 구하던 라힐은 결국 불법체류자로 붙잡히게 되고 그것도 모른 체 하염없이 요나스와 기다리던 자인은 눈물겹게 요나스를 돌본다. 겨우 12살밖에 안 된 자인은 다양한 방법을 쓰며 요나스를 돌보려고 하지만 끝까지 요나스를 돌보지 못하고 평소에 요나스를 맡기라고 부추긴 아스프로에게 맡긴다. 그리고 시장에서 만난 어떤 아이를 통해 스웨덴에서의 삶을 꿈꾸게 되고 스웨덴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스웨덴으로 가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하고 신분증을 찾기 위해 집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알게 됐고, 결혼했던 사하르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사하르가 결혼 후 임신하고 2, 3개월 됐을 때 하혈이 심해 병원에 갔지만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그런 자인은 결국 칼을 가지고 사하르와 결혼한 남자를 찌르고 감옥에 가게 된다. 그렇게 감옥에 가게 된 자인이 영화 속 첫 장면과 연결되며 재판장에 선 것이다. 재판장에 선 날 부모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사실 자인의 어머니는 또 아이를 잉태한 상태이며 자인은 그 아이도 나처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 자인의 말에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영화 후반부 말미에 부모를 고소하고 변호사와 접견 중 자인은 말한다. 아이를 돌보지 않는 부모와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며 거지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정말 자인의 이 말은 모두가 들어야 마땅한 말이 아닐까 싶다. 아이를 돌보지 않는 부모들, 아이를 학대하고 숨지게 한 파렴치한 부모들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치며 깜짝 놀라지만 정작 지금도 곳곳에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이들과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다. 아니 자인만큼의 비참한 삶은 아닐지라도 부모로서 나는 우리는 아이를 존중받고 사랑받는 존재로 키우고 있는가? 물어보고 싶다. 영화를 보며 내가 자인이 아니어서, 내가 자인의 부모가 아니어서, 내가 사는 나라가 아니어서라고 다행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실상을 아는 것 이상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부모들은 과연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기를 소망한다. 또한 지금도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 장면에 드디어 자인의 웃는 모습이 나온다. 출생신고조차 안 된 자인의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자인은 밝게 웃는다. 그 해맑은 미소가 가슴 아픈 영화 가버나움이다.
가버나움을 만든 감독은 영화 속 자인의 변호사 역할을 했던 ‘나딘 라바키’라는 배우로 레바논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이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이 영화로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실제 난민, 노숙자, 불법체류자들이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영화 제작진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에 대해 현재까지도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를 통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난민, 불법체류자의 실상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을 향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을 사는 부모들에게도 많은 도전이 됐으리라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자인과 같은 자인이 더 이상 없기를, 고통받는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를, 책임 있는 부모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