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뿌리에게', 김기림 '연륜'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박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서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 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져 있을 테니
* 흙을 화자로 뿌리를 청자로 설정하여 뿌리를 향해 빈 그릇으로 남을 때까지 헌신하는 흙의 사랑이 감동을 주는 시이다. 작은 그릇으로, 껍데기로, 빈 그릇으로까지 이어지는 시어들을 통해 희생하는 흙의 사랑은 마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떠올리듯 자식을 향해 모든 것을 주고 점점 휘어지고 작아지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고귀한 희생의 사랑은 비단 부모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사랑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뿌리가 줄기로 솟아나고 다시 연한 흙으로 재생되는 모습을 보며 생명의 순환이 곧 사랑의 순환으로 진정 이 시대에 사랑이 온전히 순환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해 본다.
연륜 / 김기림
무너지는 꽃 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떨며
산호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 꽃 이파리처럼 발에 깔리는 서른 해의 삶을 살아온 화자의 삶은 구름같이 피어나지 못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그런 화자가 자신을 성찰하고 불꽃처럼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우리도 불꽃같은 삶을 살기를 독려하는 것 같다. 연륜이란 여러 해 동안 살아온 삶의 숙련도 정도를 보여주는 단어로 연륜이 깊다는 긍정의 의미이지만 초반의 연륜이라는 시어는 그런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화자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듯이 연륜은 나이만 먹었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를 향해 이상을 향해 불꽃처럼 살 때 진정한 연륜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 화자의 의지처럼 불꽃처럼 열렬히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