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앨리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우개처럼 사라져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끊임없이 그 기억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며 애쓰는 앨리스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또한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몇 번 영화를 보려고 시도하다가 최근에야 끝까지 보게 된 영화 ‘스틸 앨리스’이다.
1. 앨리스 하울랜드(줄리안 무어)
콜롬비아 대학의 언어학 교수, 세 아이의 어머니, 의사 남편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그녀 앨리스 하울랜드.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조발성 알츠하이머. 강의를 하다가 생각이 나지 않는 단어와 늘 조깅하는 거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앨리스. 뭔가 이상하다 느끼고 병원을 찾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로부터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유전성인 이 병은 65세 이상에게 나타나지만 50대였던 앨리스에게 나타났고 급하게 나빠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만약에 나에게도 이런 일이 찾아온다면? 아니 그렇지 않아도 요즘 깜빡거리는 일이 잦아져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정말 어쩌나라는 생각에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이 덜컹거렸다.
확실한 진단이라는 의사의 말에 덤덤히 받아들일 것 같던 앨리스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최근의 일을 이야기하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다. 특히 유전에 의한 것이기에 자녀들에게까지도 유전될 수 있는 상황으로 검사를 받겠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결국 큰딸이 양성으로 나오기에 미안한 마음이 더했을 것이다. 결국 이 병으로 인해 앨리스는 일을 그만두게 되고 점점 사라지는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단어를 공부하고 또한 각종 질문과 대답을 기록하며 기억의 끊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급격하게도 인지 능력은 떨어지고 공간 지각 능력까지 떨어지며 급기야는 집 안에서도 화장실이 어딘지를 알지 못한 채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막내가 연기를 끝내고 인사할 때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얘기를 한다. “엄마, 리디아야”라는 말을 듣고 “나도 안다”라고 얘기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앨리스다. 그 앨리스를 막내딸인 리디아가 옆에서 보살피며 엄마와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에게 책의 한 부분을 읽어주며 엄마에게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 것 같으냐고 물어본다. 말하는 것도 느려진 앨리스가 겨우겨우 단어를 말한다. 사랑이라고, 사랑이라는 말이 여운으로 길게 남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2. 조발성 알츠하이머란?
영화의 시작도 영화의 끝도 너무 잔잔해서 과연 영화가 알츠하이머라는 환자를 다룬 영화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그 환자의 증세가 섬세하게 드러나서 이런 것이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은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구나를 선명하게 알게 된다.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늘 다니던 곳에서도 멍하니 서서 여가가 어딜까 한참을 생각한다. 사람과 인사를 나누지만 금방 잊고 또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한다. 약속을 잊어버리고 냉장고 안에서 예상치 못한 물건들이 나온다. 집에서도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 휴대폰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찾는다. 똑같은 것을 계속 물어본다. 무엇을 말하려고 할 때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알아보지 못한다. 이 모든 증세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앨리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이다. 기억력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 시공간에 지각능력까지 저하되는 알츠하이머. 말로만 듣던 알츠하이머를 영화를 통해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충격과 안타까움과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찾아올 수 있는 무서운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앨리스가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다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자신이 부끄럽다고 한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말인가? 아픔보다도 더 큰 부끄러움과 싸워야 하는 것이 또한 알츠하이머라는 것이다. 이 알츠하이머로 인해 가족들 간에도 서로에게 큰 아픔이 된다. 물론 영화 속에 남편은 좋은 남편으로 아내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고, 항상 아내 옆에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일로 인해 계속 아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큰딸과 아들 역시 돌불 수 없는 상황이라 막내가 엄마와 함께 지내게 된다. 결국 이 병으로 인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3. 나로 살아간다는 것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인한 아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이 영화가 빛이 나는 것은 앨리스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특히 언어학 교수로 살아왔던 그녀. 그녀에게 있어서의 기억은, 언어는 평생에 가장 큰 재산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조발성 진단을 받기 전 그녀에게 남편이 자신도 단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며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녀는 남편에게 말한다.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야. 뇌가 죽어가는 느낌이야, 내가 평생 이룬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전부”라면서 그녀가 엉엉 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란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러기에 그녀는 기억을 잡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끊임없이 단어를 외우고 많은 질문에 답을 써가면서 기억의 끊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똑같은 질문을 몇 번 하면서 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연설한 내용은 큰 감동을 준다. “나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이지만 매일 상실의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내 태도를 상실하고, 내 목표를 상실하고 잠을 상실하지만 기억을 가장 많이 상실합니다. 평생의 기억이 나의 큰 재산이지만 제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이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옥 같은 고통입니다. 우리의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의 병일 뿐입니다. 이 병도 원인이 있고, 진행이 되며. 치료의 방법이 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자신을 질책하지만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예전의 나로 남기 위해” 연설 내용이 너무 좋아서 그 생각나는 일부를 기록했는데, 정말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얼마나 순간을 살기 위해, 사라져 가는 기억이지만 그 기억 속에서 눈물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만큼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기억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순간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음이 얼마나 미안한 일이가 생각이 든다. 앨리스의 말처럼 우리는 순간을 살면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상실하고 있다는 것에 다그치지 않으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어도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이 연설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빛이 나고 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안 무어 역시 빛이 나고 아름답다.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 영화를 볼 이유가 될 것 같다.
우리에게도 앨리스처럼 어느 순간 어떤 시련이 올지 모르겠다. 그것이 알츠하이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병일 수도 있고, 내가 아닌 가족이 또 다른 여러 가지 시련이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특히나 유전적 질병처럼 어쩌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좌절하거나 낙망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모습을 살아가며 그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 그 아픔을 견뎌내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정작 나로서의 존재를 잊지 않는 것, 나답게 사는 것 그리고 끝까지 그것을 견뎌내고자 하는 의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크고 작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도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나로서 살기 위해 부단히 살아간다면 그 모든 순간순간이 빛이 되고 기쁨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사라지는 모든 순간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소중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모든 병마와 싸우는 환자분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하루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