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효자’
풍수지탄[風樹之歎]이라는 말이 있다. 효도를 다하지 못했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어,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슬픔을 이르는 말이다. 그 말 앞에 자신을 돌아본 적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그 말을 흘려보냈는데, 오늘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 ‘효자’이다. 제목부터 너무나 원색적이고 진부하며, 이미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제목이라 거부감도 있지만 '효'라는 말 앞에 자식 된 자로서 또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제목이라 ‘너는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며, ‘너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탄식하게 된다.
영화 시작과 함께 돌아가신 어머니를 묻으며 눈물짓는 다섯 아들(길남, 길중, 길영, 춘복, 길호)과 길남(첫째)의 아내, 그중 세 형제가 만나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다가 태풍이 온다는 라디오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묘를 찾기로 한다. 그나마 태풍이 그치고 어머니의 묘를 찾았지만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묻었던 어머니의 관이 사라지고 그곳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체도 찾지 못한 채 돌아온 날, 둘째 형(길중)이 종산까지 팔아먹었다며 재산을 혼자 먹으려 한다고 길영(셋째)은 원망을 하고 ‘네가 땅을 골고루 나눠주지 않았냐’며 서로 옥신각신 말다툼에 상까지 엎으며 형제들은 싸운다. 그런데 그곳에 어머니가 좀비가 되어서 나타난다. 심장은 뛰지 않지만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길호(막내)는 기절을 하고, 그나마 형제들은 좀비인 어머니도 어머니라며 그동안 못 해 드렸던 효도를 하고자 한다.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까지, 그러나 좀비가 된 어머니로 인해 사건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동네 닭들이 없어지기도 하고, 더군다나 좀비가 된 어머니의 얼굴이 180도 회전이 되기도 하고, 더군다나 칼을 두고 계속 찌르는 듯한 모습으로 길중에게 어머니가 칼을 겨눈다.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길남의 하나밖에 없는 미영(딸)을 죽이려고 한다. 특히 미영은 뇌가 아픈 아이였는데 그 아이를 어머니가 죽이려 하자 형제들은 결국 어머니를 저승으로 보내려고 한다.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 농약을 준비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에도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던 일은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네 형제들만 알고 있었고, 이복형제였던 춘복(넷째)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결국 춘복이는 어머니가 좀비가 된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다가 좀비인 어머니를 납치하는 일까지 벌이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춘자(어머니)가 좀비가 되어 나타난 사실이 동네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춘자가 살아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이지만 결국 무당이 좀비가 된 춘자를 죽이지 않으면 마을에 큰일이 난다는 얘기를 듣고 결국 마을 사람들 모두가 춘자를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미영을 죽이려 한 어머니였기에 자식들도 어머니를 죽이려는 일에 함께 하게 되는데, 바로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춘복이 어머니를 어딘가로 모시기 위해 일을 꾸며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춘복이가 보여준 cctv 영상을 통해 어머니가 손녀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녀가 쓰러졌을 때 어머니가 오던 차를 막고 손녀를 일으켜 주는 장면임을 알게 된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춘복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려고 사라진 사이 어머니는 어딘가로 없어지고 그때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촬영했던 리포터의 영상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이 영상에 등장한 길남의 아내를 통해 종산을 팔았던 것이 다 미영의 병원비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어머니가 미영을 구해주셨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다섯 형제를 위해 어머니가 직접 죽을 쑤고 좀비가 된 어머니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결국 불 속으로 들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과 사랑을 알게 된 다섯 형제들과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게 되고 어머니를 위해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영정 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좀비가 되어서 나타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나 기발하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최근에 좀비가 된 딸에 대한 영화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전까지 봤던 좀비 영화와는 맥을 달리하면서도 가족에게 좀비라는 존재를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신선하면서도 공감을 하게 한다. 살아 있으나 좀비와 같은 존재. 어쩌면 우리에게 부모, 자식, 형제가 그런 좀비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만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 형제들이 어떻게 사는지 하물며 자식이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는지 진정 그 내면의 아픔을 생각하며 돌아보았는가? 진정 그들이 나에게 살가운 존재들이었나? 따뜻한 말 한마디,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던 그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영화 속 폐지를 줍는 노인을 바라보며 ‘저분도 누군가의 부모였을 텐데’라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며, 살아 있는 가족들을 마치 좀비처럼 대했던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며, 좀비라는 실체를 통해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우리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공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못다 한 효도에 대한 아쉬움을 죽은 후에 좀비로라도 돌아온 어머니에게 효도라도 해보자는 마음을 통해 효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것, 그러나 좀비가 된 어머니에게 행하는 모습조차도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행동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기에 정말 자식 된 자로서 부끄럽기 그지없고 그러기에 살아 있을 때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부모를 대해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만이 아니라 죽어서 좀비가 되어도 어머니는 어머니구나라는 아픈 진실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좀비라는 설정 자체가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너무나 현실감 있고, 공감되는 혹시나 내가 가족들을 좀비처럼 대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가족들에게 좀비는 아닌지. 우리 집은 과연 사람처럼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영화 거의 끝부분 자막에 孝子(효자)가 나오더니 子가 咨로 바뀌면서 孝咨(효자): 咨 (물을 자) 1. 묻다 2. 탄식하다는 자막으로 바뀌었다. ‘아! 이거구나.’ 부모를 잘 섬기는 아들이란 孝子(효자)의 의미에서 효를 물어보다, 효를 물어보고 탄식하다는 孝咨(효자)의 의미를 던져주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효란 어떤 의미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효가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단순히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효도일까?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효도를 말하는 것이 과거의 고리타분한 어떤 사상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정 효라는 것은 다만 부모를 향한 자식 된 도리이기 이전에 부모가 쏟은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좀비가 되어 버린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효도한다고 애를 쓰며, 그 어머니를 향한 애정을 보여주지만 정작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고 눈물겹다. 좀비가 되어서도 손녀를 생각하며 손녀가 쓰러졌을 때 달려오는 차를 막아서며 손녀를 보호하고, 아픈 손녀를 달래며 그 아픔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치매가 되어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쓰러진 손녀를 없고 달렸다. 어린 자식들을 위해 먹이시고 입히시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생각하며 손수 죽을 쑤어 남겼고, 좀비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불 속으로 뛰어들며 자신을 희생했다.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은 ‘너희들은 내 보물이고 내가 너희를 지킨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더더욱 눈물짓게 한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옹다옹 싸우는 형제들, 치매인 어머니를 묶은 채 방치하던 자식들, 살아 있을 때 그들이 어머니에게 보여준 것들을 떠올려본다면 어머니의 사랑이 웬 말인가 싶지만 어머니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돌봤던 것이다. 더군다나 형제들에게조차도 소외된 춘복이를 따뜻하게 아들로 맞아들이며 봄에 들어온 복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어머니의 사랑, 따뜻한 죽을 마지막으로 아들들에게 남긴 어머니의 마음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이 변해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음을 깊이 새겨 본다. 그러기에 부모의 그 큰 사랑을 떠올려보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효도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부모의 사랑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하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를 섬기는 것, 효라는 이름이 너무나 크고 무겁게 다가오며 우리에게 마치 너무 큰 것을 요구하는 구속처럼 생각하기 이르렀기에 효도가 너무 부담스럽고 막연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한번 물질적으로 뭔가를 드리며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 이전에 부모의 사랑, 측량할 수 없음을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런 부모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효란 진정한 어떠한 마음의 자세에서 나와야 하는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 우리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세상이 너무나 많이 험하여 부모가 자식이,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고 위협하고 아니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있어서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어떤 마음으로 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까?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때로는 우리는 부모 자식을 잊어버리고 때로는 우리 눈에 닥친 재물과 권력과 유혹에 몸부림치며 그것이 형제든 부모든 또는 주변 이웃이든 우리의 눈을 가릴 때가 많다. 돌이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내가 누구이고 나의 부모가 누구이며 나를 향한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효의 본질, 그 참된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궁이에서 썩어 문드러진 어머니의 재를 바라보며 영화 속 자식들이 흘리는 그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오늘 나 자신에게 효자, 효의 의미를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