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어도 걸어도’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삶이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최근에 읽은 소설책에 나오는 말이었는데 깊이 공감이 된다. 누군가를 위해 했던 최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살리는 기쁨이었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오로지 그 일을 했던 사람과 그의 가족의 아픔일 수 있다. ‘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 역시 10여 년 전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죽은 형 준페이로 인해 누군가는 살았지만 그로 인해 남아 있는 가족들,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마음의 깊은 상처 속에 살아가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겠지만 죽음으로 인해 드리워진 슬픔은 영원히 살아 숨 쉬며 밑바닥에 있었다 싶었던 그 기억들이 순간순간 고개를 들며 삶의 전 영역 속에 녹아들었다가도 일어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과 고통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랴. 영원히 박제되지 않은 채 그 기억들이 엉키고 엉키어도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며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그 고통이 남아 있는 자식에게도 때로는 상처로 때로는 미안함으로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의사로 은퇴한 아버지와 다른 일은 해보지 않고 주부로 살아온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료타의 가족과 누나인 치나미 가족이 함께 모인다. 10년 전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죽은 형 준페이의 기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딸과 음식을 만들던 어머니는 료타가 사별한 전 남편의 아이가 있는 여자와 결혼한 것에 대한 불만과 속상함을 얘기하고, 딸이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려해도 아버지가 싫어하지 않을까 얘기한다. 료타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반갑기보다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말을 한다. 평생 의사로 살아온 아버지이기에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료타는 그림을 복원하는 일을 전공하며 지금은 사실 실직 상태다. 그런 사실을 아버지나 어머니가 알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기에 함께 데리고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의사가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할 때 의사를 시키지 않겠다고 하며 그런 얘기를 하지 말라고 아버지게에 얘기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뾰족하게 상처를 주는 말은 영화 내내 지속된다. 특히 형으로 인해 목숨을 구한 사람 ‘요시오’가 매년 형의 기일에 초대받는데 요시오가 아직 제대로 된 일을 찾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하자 요시오가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형이 하찮은 것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때 료타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며 인생을 비교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항변한다. 어떻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할까 싶다가도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아버지의 마음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상처가 크고 깊기에 아마도 더 그렇게 아픈 말을 하지 않을까. 어머니조차도 ‘다시는 요시오를 오지 말게 하자 얼마나 힘들겠는가’라고 료타가 얘기했을 때 ‘형의 일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일 년에 하루 정도는 고통을 줘도 되지 않냐고 그렇게 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가 차갑고 무서우면서도 얼마나 형에 대한 죽음의 상처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처절하게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1박 2일 동안 먹고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서 간간히 웃음이 나오지만 웃음보다 더 난감함과 분노와 서로를 겨누는 칼 같은 위태로움이 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들의 대화는 특별한 사건이 없더라도 계속해서 긴장하며 볼 수밖에 없는 뭔가 더 큰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이런 긴장감을 뭐라 말할까 싶었는데 료타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한 “늘 이렇게 한 발씩 늦는다고”라고 한 말이 아닐까. 어머니가 형이 살려준 요시오의 모습이 어느 유명한 스모 선수를 닮았는데, 그 스모 선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해 대답을 못했는데, 료타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선수 이름이 생각났다면서 얘기한다. 그리고 “늘 이렇게 한 발씩 늦는다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한다. 한 발씩 늦는다는 그 말이야말로 정말 어긋난 가족들의 모습을, 우리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라지만 형과 동생의 일을 헷갈려 기억하는 아버지, 아버지가 야구를 보신다고 생각했는데 축구장을 가시는 줄 지금에야 알았다는 아들 어쩌면 어긋난 기억들과 한 발씩 늦었던 것들이 계속 이어졌기에 살가운 듯 보이는 가족들이 모습이 계속 위태하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료타를 보며 설에는 볼 수 있겠다고 부모들은 말하지만 지금 얼굴 봤으니 설에는 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료타는 말한다. 그의 말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영화에 바다에 빠진 배가 나왔는데, 가족들도 마치 바다에 빠진 배처럼 흔들려 보였다. 결국 시간이 되면 축구장에 함께 가고 싶었던 아버지의 소망은 이루지 못한 채 3년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소망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어떤 소망도 이루지 못한 채 부모를 떠난 보낸 료타는 그래도 시간이 지나 딸, 아들, 아내와 함께 형의 기일에 형의 무덤을 찾으며 영화는 끝난다.
가족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고 마음을 쓰지만 또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서로의 시간들을 견딘다.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지만 가족 또한 나에게는 또 하나의 '타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보는 내내 큰 사건이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는 시간까지 긴장하며 보는 모습들 속에 어느 가족들에게도 볼 수 있을 법한 가족들의 대화를 상기시키며 씁쓸함이 남는다. 그러면서도 우리 가족들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 우리 가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걸어도 걸어도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그 어떤 죽음도 사건도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고, 가족 사이에도 익숙하지 않을 그 어떤 것들이 많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그렇게 연약하면서도 때로는 악하게 살지만 준페이처럼 누군가를 위해서는 목숨을 희생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가족들의 모습에서도 연약함과 악함 모습들이 있지만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함께 삶을 이어갈 것이다. 다시 한번 가족들을 바라보며 어긋난 우리들의 모습을 조금씩 맞춰가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