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살핌의 정석' 두 번째 이야기
2. 슬픔에 매몰되지 않게, 너무 과하지 않게 그리고 약간의 반전.
트레버도 벤도 힘든 상황에 있기에 그 자체로 눈물이 날 수 있지만 영화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눈물 흘리는 장면이었으면 보기 힘들었을 텐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청소년관람불가가 아닐 것 같은 영화인데 대화 속에 나오는 언어(10대 소년의 필터링 없는 언어, 상황적 대화) 때문인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다.(그렇다고 청소년관람불가라고 할 정도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좀 놀랍기도 하다. 어쨌든 아주 극적이지는 않지만 종종 있었던 반전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다.
여행 도중 만난 소녀(도트)와 데이트를 하게 된 트레버, 흥분으로 들떠 있는 트레버에게 약이 없다고 당황하며 트레버를 일부러 놀라게 하는 벤, 벤과 트레버의 여행 속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던 차가 있어서 벤에게 이혼서류를 주기 위한 사람이나 트레버의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운전사가 도트를 걱정했던 아빠였다는 것. 멋진 광경을 보던 중에 피치스가 아이를 출산하고 산파 역할을 하게 된 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반전은 트레버의 아버지다. 3살 때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지금까지 편지를 써서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하려고 갔는데 너무나 어이없게도 그 편지를 쓴 존재가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는 그래서 아이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나쁜 아빠의 존재는 가장 큰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순간순간 예측하지 않은 장면들 속에 과잉의 슬픔을 주지 않는 것도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면들이 때로는 잔잔한 감동으로 파괴되는 감동으로 다가오며 이것이 또한 인생이고 인간의 성장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3. 영화 속 다양한 아버지
영화 속 다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아버지를 어떤 유형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벤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들을 잃은 아버지다. 그래서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내의 이혼 서류장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아픔 속에 선택한 간병인의 일은 쉽지 않지만 책임감 있게 수행한다. 어쩌면 벤의 일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극복하기 쉬운 일은 아니며 그 일은 일평생 가슴에 묻고 살 수밖에 없는 일일 수 있다. 그러기에 벤 역시도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피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벤과 똑같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벤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과 생명 탄생이라는 위대한 일 그리고 여행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여행 후에 조금은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 후에 간병인의 일을 그만두고 아내에게 직접 이혼 서류장을 갖다 주고 글 쓰는 일을 다시 하게 된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일이 꼭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회피하고 직면하지 않는다면 치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밖으로 나와서 직면하여 생각하며 삶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때 흔적은 남겠지만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있지 않을까.
3살 때 아이를 떠난 트레버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아내가 아이에게 편지 쓰기를 요청할 때 그것을 거절한 아버지. 과연 아버지는 아이를 생각하기는 했을까. 사업적으로 승승장구한 아버지는 아이의 방문에 의아해하며 15년이 지나 찾아간 아들에게 따뜻한 인사는커녕 돈이나 몇 푼 주며 보내려고 한다. 아들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는 트레버의 아버지는 이기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다. 주변에 이런 유사한 모습의 아버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아이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딸을 염려하여 딸이 가는 길을 지켜보고 딸이 가기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도트의 아버지. 도트 아버지 자신의 말처럼 완벽한 아버지가 아니고 딸과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가족으로서 딸의 안전을 기원하며 염려하는 모습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닮아 있는 듯하다. 3년 전 어머니를 잃고 괴로움을 겪는 딸만큼 아내를 잃은 아버지도 힘들었겠지. 그런 딸이 메모를 남기고 새롭게 뭔가를 하기 위해 떠난다고 한다면 어느 아빠가 딸을 걱정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겉으로는 무심하지만 속 깊게 자식을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걱정하며 위하는 아버지 또한 우리 사회에 많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피치스의 남편. 세상에서 가장 깊은 구덩이 명소에서 태어난 아기(엘턴)의 아버지.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간 아버지다. 두 번째 파병을 간 남편 때문에 피치스는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다가 차 고장으로 벤과 만나게 된 것이다. 벤을 만나서 다행이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었다. 엘턴의 아버지는 나중에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듣게 되겠지.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자신의 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일이 있겠지만 그래도 진정 아버지가 있어야 할 자리라면 있어 주기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함 것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렇다는 나는 어느 아버지의 모습과 가장 닮았을까. 1대 1이 아닌 순간순간 다양한 모습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다만 무책임한 부모가 아니라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이가 정말 필요할 때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바란다. 아이와 함께 나도 성장해 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4. 어디서 본 듯한 배우들과 로드 무비
벤의 역할을 했던 폴 러드라는 배우 어디서 본 듯한데 어디에서 나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의 과하지 않은 연기가 불편하지 않고, 나중에 찾아보니 앤트맨 역할을 했던 남자였다. 셀레나 고메즈 역시도 너무나 많이 들었던 익숙한 이름이다. 물론 트레버 역할을 했던 배우는 낯설기는 하지만 그 힘든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서 유쾌하게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이 영화는 배우들을 다시 찾아보게 되고 배우들이 했던 영화도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로드 무비가 그렇듯 여행의 도중에 보았던 아름다운 볼거리들과 세계에서 가장 큰 구덩이가 있었던 명소는 보는 즐거움이다. 무엇보다도 여행의 큰 기쁨은 여행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이 영화 역시 보여주고 있다. 세상 밖으로 거의 나가보지 않고 집에서만 즐기며 똑같은 음식만을 먹는 트레버에게 여행은 너무나 큰 세상이며,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향한 큰 도전이다. 이 도전(여행)을 통해 트레버는 다양한 상황을 접하고 사람과 관계를 맺어 가며 성장한다. 벤 역시도 여행을 통해 트레버를 돌보며 한 아이의 생명을 낳는 일을 도우며 상처를 치유하고 피했던 일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결국 여행의 과정을 통해 두 사람 모두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한다. 어쩌면 이것이 보살핌이 아닐까 싶다.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그렇게 홀로서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살핌의 정석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기 전, 보면서, 보고 난 후 나의 보살핌의 대상들을 떠올려 봤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나의 보살핌의 대상들을 생각하기 전 간병인의 교육에도 있었던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말을 깊이 새기게 됐다. 어쩌면 가장 보살핌의 대상이 나이고 내가 건강함으로 누군가를 또한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 자신이 부족해도 서로의 보살핌으로 또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보살핌이란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살피는 자도 보살핌을 받는 자도 모두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삶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 소년에게 그 간병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된 일이고 어쩌면 벤에게도 그 소년과의 만남이 힘든 순간일 수 있었지만 또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축복된 일이었다. 이처럼 서로에게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축복된 만남이 자주 있기를 열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