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용서, 화해 그리고 살아라!

영화 ‘프랑켄슈타인’ (감독:기예르모 델 토로)

by 김승희


피조물을 창조한다는 것. 죽음을 이기는 것, 죽음에 도전한다는 것은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오만함이 아닐까? 그 오만함에 도전한 자가 바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은 어린 시절 엄격한 아버지와 사랑했던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죽는 죽음으로 인해, 더더욱 어머니의 죽음 이후 동생만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빅터는 사랑에 목마를 수밖에 없었고, 죽음을 정복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죽음을 정복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어둠의 천사를 보고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빅터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의사가 되겠다고 한다. 그리고 엄격하게 그를 가르쳤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도전한 빅터는 에든버러 재학 시절 징계 심사 과정에서 탄생은 신의 영역이지만 죽음은 도전해야 할 과제라고 여기며 두 명의 시체를 이어 붙인 복합실험체에 전극을 연결하여 되살리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지만 결국 제적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날 빅터의 실험에 관심을 가졌던 무기업자 하인리히 하를란더는 나중에 자신의 부탁을 얘기할 수도 있다며 죽음을 뛰어넘어 인간을 조립해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빅터의 실험에 후원을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 속에서 가장 좋은 부위를 골라 피조물을 만들게 되고 결국 폭풍우 속 번개의 힘으로 크리처(제이콥 엘로디)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빅터는 굉장히 크고 흉측한 크리처를 사슬로 묶어두고 창조 이후에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성취에 대해 부자연스럽게 느끼고 공허함만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빅터는 ‘빅터’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크리처를 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더구나 상처 난 손이 금방 아무는 크리처를 보며 놀라워한다. 이때 동생의 약혼녀이자 마음에 품었던 엘리자베스(미아 고스)가 크리처의 고통과 순수함을 보며 관심을 갖게 되자 크리처를 더더욱 다그치며 공포스럽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지만 크리처는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 순간 빅터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며 지능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빅터가 마지막에 할 말이 없냐라고 외쳤는데 크리처가 엘리자베스라는 말을 하자 결국 크리처를 죽이기로 하고 불을 지른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은 빅터는 크리처를 없애기로 했지만 크리처는 죽지 않았다. 생명을 창조하고자 했던 빅터는 결국 죽음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살아남은 크리처는 어떤 사냥꾼의 집에 숨어 들어서 눈먼 노인으로부터 언어와 감정을 배우게 된다. 눈먼 노인은 크리처의 상처 난 얼굴과 목소리를 듣고 그가 얼마나 선하고 다정한 사람인지 얘기하며 함께 지내자고 한다. 음식과 불을 나눠주고 가지고 있는 것도 나눠주며 친구로 삼고 싶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크리처는 눈먼 노인과 친구가 되고 눈먼 노인이 준 책을 통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읽게 된다. 다양한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이 흘렀고 눈먼 노인은 크리처에게 밀턴의 실낙원을 소개한다. 그때 크리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고, 어디서 왔는지도 궁금해한다. 그런 크리처에게 자신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얘기하며 한 남자의 생명을 빼앗았던 얘기를 고백하며 용서하고 잊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한다. 눈먼 노인의 말을 듣고 자신의 옛날을 기억하며 빅터가 자신을 만들었던 곳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이 죽은 시체더미로 만들어졌던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된 크리처는 특히나 자신의 얼굴을 보며 더욱 고통에 잠기게 된다. 결국 그는 빅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다시 눈먼 노인의 집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눈먼 노인의 피해를 입힌 짐승들을 쫓아내지만 그곳에 온 사람들은 그 사실도 모르고 크리처에게 총을 쏜다. 총에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만 크리처는 다시 살아난다. 결코 죽을 수도 없는 크리처는 무자비한 삶을 반복해서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총에 맞았던 상처는 아물고 다시 살아난 그는 찬 공기를 맞으며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되고 인간의 모든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치료 약인 죽음 그 선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크리처는 결국 빅터를 찾아가 자신은 죽을 수도 없는 괴물이라며 동반자를 요구하지만 빅터는 거절하고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빅터에게 분노하며 그를 집어던진다. 특히나 크리처가 빅터를 찾아온 날은 엘리자베스와 윌리엄 프랑켄슈타인의 결혼식 날. 큰 소리가 나는 곳에 서 있던 크리처를 보고 엘리자베스는 다가갔지만 크리처를 죽이려던 빅터의 총에 엘리자베스는 크리처 대신 맞고 죽어가게 된다. 이를 본 빅터는 윌리엄에게 크리처가 했다고 거짓말하며 결국 크리처에게 달려든 윌리엄도 상처를 입고 죽게 된다. 죽어가던 윌리엄은 형이 두려웠다고 하며 괴물은 형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더욱 분노하는 빅터. 정말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인가 크리처인가 묻게 된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크리처가 보는 앞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그때 ‘잃어버리고 되찾는 것이 사랑의 생애라며 네 눈이 내게 머물고 있을 때 떠나는 것이 나아’라는 말을 한다. 엘리자베스는 떠났고 크리처는 자신의 창조자인 빅터를 죽이려고 한다. 너는 나의 창조주이지만 내가 너의 주인이 되겠다며 크리처는 떠나고 빅터는 크리처를 총으로 쏘며 죽고 죽이는 숲을 지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북극까지 서로 쫓고 쫓기며 간다. 아무것도 없는 북극의 끝에 와서 부서진 채 빅터는 버려지고 크리처는 다시 살아난다. 북극을 항해하던 선장의 배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빅터는 자신을 찾아온 크리처의 손을 잡았고 “미안하다 후회가 뼈에 사무쳐 이제야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용서해 다오 내 아들아”라고 하며 “스스로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여라.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네게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이라며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다오 부탁할 때 크리처는 “빅터 당신을 용서할게요” 그리고 이마에 입 맞추고 빅터는 “아버지 쉬어라”라고 말한다. “우리도 이제야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라고 크리처는 말을 한다. 그리고 북극해를 탐험하다가 얼음 속에 갇혀있던 배를 밀어 바다로 나아가게 도와주고 크리처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바이런경의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진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는 문장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사랑의 결핍자 빅터, 오만함과 독선, 자신의 만든 피조물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잔인함과 달리 어느 누구보다도 순수한 영혼을 지닌 크리처 과연 누가 진정한 괴물이고 누가 진정한 인간인가?


무엇보다 영화를 보며 크리처에게 유독 눈이 갔던 이유는 크리처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은 시체로 만든 단순한 괴물, 폭력성과 괴력을 지닌 잔인한 괴물이 아니라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고 새롭게 태어난 아기와 같은 존재로서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배우며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 과정에서 새롭게 거듭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지각한 크리처의 고민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가져야 할 고민이라는 것, 그것에 비해 빅터는 피조물을 창조했지만 창조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고 더더욱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사랑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정체성의 과정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통해 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작품 속 눈먼 노인과 엘리자베스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랑의 존재로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진정한 가르침을 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특히 눈먼 노인은 눈이 멀었기에 크리처의 외면을 보기보다는 내면을 보게 되고 진정 그의 상처를 알게 된 노인은 진정 친구로서 크리처를 따스하게 대한다. 그리고 용서의 지혜를 가르쳐 주게 된다. 그랬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빅터가 크리처에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할 때 진정으로 크리처 역시 빅터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보여준 마지막 장면은 결국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고 그 관계란 진정한 용서와 화해만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괴물이든 인간이든 사랑받는 존재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사랑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가끔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영화를 보며 인간의 모든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치료 약인 죽음. 그 선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크리처의 대사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죽지 않고 살아가는 고통과 고독은 아마도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고통이 아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죽을 만큼의 고통과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말처럼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난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 존재란 어느 누가 부여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꿋꿋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책임감 있게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용서와 화해를 통해 진정한 마음에 평안이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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