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릇이라야 큰 용기가 담긴다

지리산에서 배운 그릇의 크기

by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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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그때의 우리는 경험도 준비도 장비도 부족했다. 그저 젊은 패기 하나로 떠난 무모한 도전이었다. 기차를 타고 남원에 내려 버스로 노고단 근처까지 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산행이 시작됐다. 숨이 턱에 찰 만큼 오르막을 오르자 노고단의 고요한 능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른 등산객들은 저녁을 준비하며 분주했지만, 우리의 배낭에는 과자 부스러기 몇 조각뿐이었다. 먹을 것도, 장비도, 지도도 없었다.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나눠 먹으며 ‘가보자’는 마음 하나로 잠을 청했다.

새벽 네 시, 어둠을 가르는 건 헤드랜턴의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산속은 적막했고 숨소리만 들렸다.

“이 시간에 출발한다고? 미쳤어?” 친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등산화는 새것이라 발에 맞지 않았고, 배낭은 무겁기만 했다. 안개가 짙게 깔리더니 비까지 내렸다. 신발은 금세 젖고 발끝은 시렸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배는 고프고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단단해지고 있었다.

연화천 산장에 도착했을 때, 라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 냄새만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산장지기 아저씨에게 밥 한 덩이만 얻을 수 있겠냐고 부탁드렸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밥을 내주었다. 그 한 덩이가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 굶주린 몸을 달래고 메마른 마음을 위로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인생도 이와 같다는 것을. 버티고 견디면 결국 새로운 맛이 찾아온다.

기운을 내 천왕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산행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만 더.” 그 말만 되뇌며 발을 옮겼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배낭의 무게는 어깨를 짓눌렀다. 옆 사람들은 여유롭게 걷는데,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평생 나 자신에게 질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 속에서 이상한 생명력이 피어났다. 몸이 힘들수록 마음은 단단해졌다.

장터목 산장에 닿았을 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천왕봉을 찍고 하룻밤을 자야 했지만, 예약이 안 돼 잘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하산밖에 방법이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내려갈 힘도 없는데 내려가야 했다. 물집투성이 발로 미끄러운 돌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내가 여기까지 왔네.” 절망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자신이 낯설고 대견했다.

하산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불빛은 보이지 않고 희미한 달빛만이 길을 비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떨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우물을 만나면 그 물로 다리를 씻으며 버텼다. 친구와 멀어져 홀로 걷는 길에서 눈물이 흘렀다. 손등으로 훔치며 또 걸었다. 마침내 동네 불빛이 보였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숙소에 도착하자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안의 작은 그릇이 큰 그릇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그때의 눈물이 기쁨이었는지 안도였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내가 내 한계를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산에서 만난 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산은 네가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준단다. 작은 그릇엔 작은 게 담기고, 큰 그릇엔 큰 게 담기지.”

그 말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사람의 그릇은 평온할 때가 아니라, 한계에 부딪힐 때 커진다는 걸 배웠다

하산길에서 깨달았다. 내가 바뀐 건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마다 ‘한 걸음 더’ 내디뎠기 때문이었다. 작은 그릇이던 내가, 이 험한 길을 견딜 만큼 커졌다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내 삶의 기준이 달라졌다. 지리산은 내게 인내와 겸손, 그리고 삶의 리듬을 가르쳐 주었다.

지리산에서 돌아온 후 나는 달라졌다. 일이 힘들 때도,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지리산이 떠올랐다. “그때 그걸 해냈잖아.”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가능해 보이기 시작했다.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이미 한계를 넘는 경험을 했으니까. 가끔은 지리산의 능선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큰 그릇이라야 큰 용기가 담긴다. 지리산은 내게 그 그릇을 만들어주었다. 그 안에 용기와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나를 담을 수 있게 했다. 산행은 끝났지만, 내 안의 여정은 계속된다.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지리산을 오른다. 그리고 그때처럼 되뇐다. “한 걸음만 더.”

지리산이 내게 가르쳐 준 건 단순한 산행의 기술이 아니다. 큰 그릇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행착오, 눈물과 땀으로 넓혀지는 것이다. 그 산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도 내 인생이라는 또 다른 지리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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