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권력으로서의 국왕
내각제 국가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국가 원수와 행정 수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반면 내각제에서 이 두 가지 기능은 분리되어 있다. 내각제에서 총리(Head of Government)는 행정 수반의 역할만 담당하고 국가 원수(Head of State)는 겸직하지 않는다.
내각제 국가에서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국왕이 맡으며,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국가를 대외적으로 대표하고 국민 통합을 이끄는 상징적, 의전적 역할을 한다. 영국이나 일본처럼 군주가 있는 나라는 '국왕'이 국가원수 역할을 하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군주가 없는 공화국에서는 국민들이 '대통령'을 선출하여 국가원수 역할을 맡기고는 한다.
여전히 영국 국왕을 모시는 영연방 왕국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국 연방 국가(영연방, Commonwealth of Nations)들이다. 영연방 56개의 회원국 중 인도나 나이지리아 등 다수 국가는 독자적인 대통령이 있는 공화국이다. 하지만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15개국은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을 특별히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이라고 부른다. 그들 국가의 원수는 영국 국왕인 찰스 3세(King Charles III)다.
영연방 왕국 국가들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했음에도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삼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우선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그들 국가에서 원수는 그저 상징적 존재일 뿐이므로 식민 지배 시절 국가 원수였던 영국 국왕을 굳이 교체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찰스 3세가 영국 국왕의 지위에서 이들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캐나다 국왕', '호주 국왕', '뉴질랜드 국왕' 등 각각의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다. 즉, 한 사람이 여러 나라의 왕관을 쓰는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의 형태를 가진다. 그런데 캐나다 국왕인 찰스 3세가 캐나다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는 국왕을 대신할 총독(Governor General)을 임명하여 국왕을 대신하도록 한다. 영연방 왕국의 다른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 총독은 해당 국가의 국민이며, 실질적으로는 자국 정부의 조언에 따라 법률 공포, 의회 개회 등 형식적인 업무만 수행한다. 영국 국왕이나 정부가 이들 국가의 정치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전통성 또한 영연방 왕국 국가들이 영국 국왕을 자국의 국왕으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 이들 국가들은 혁명이나 전쟁을 통해 급진적으로 독립하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해 가며 서서히 독립에 다가갔다. 따라서 영국 군주를 국가원수로 두는 것은 식민 지배의 잔재라기보다는, 자신들 역사의 뿌리와 제도적 연속성을 존중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 '왕립 호주 해군' 등의 명칭에서도 그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국 국왕을 자국의 국왕으로 삼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원수 자리를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인물(세습 군주)이 맡음으로써, 국내 정치의 과열을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만약 공화국이 되어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전직 정치인 등이 대통령이 되어 국가원수 직책 자체가 또 다른 정치 갈등의 장이 될 우려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상징적인 군주를 둠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이처럼 영국 국왕을 자국의 국가 원수로 삼는 것은 부작용보다는 장점이 크다. 그러므로 많은 국민들은 "현재 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있고, 국왕은 우리 정치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굳이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논쟁하면서까지 바꿀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공화국으로 전환하려면 헌법 개정, 국민투표 등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국민이 이 제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영연방 왕국의 많은 나라에서는 "이제는 완전한 독립을 위해 우리 국민을 국가원수로 삼아야 한다"는 공화국 전환 논의가 수십 년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고 찰스 3세가 즉위하면서, 군주제에 대한 지지율이 이전보다 약해져 공화국 전환 논의가 더욱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2021년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는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 자리에서 폐지하고 자국민 대통령을 선출하면서 공화국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이 강력한 우리나라의 경험에서 볼 때 영연방 왕국 국가들이 영국 국왕을 자국의 국왕으로 삼는 것은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영연방 왕국들에게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유지하는 것은 굴욕적인 식민지의 잔재라기보다는, 역사적 전통, 정치적 안정, 실용적 편의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국제정치에서 자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를 분석하면 안 되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다양한 내각제 대통령들
내각제 대통령의 역할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으로 권력이 매우 제한적이고 상징적이다. 독일의 경우 '도덕적 권위'에 집중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독일은 내각제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독일의 실질적인 권력은 연방 총리(Bundeskanzler)가 모두 가지고 연방 대통령(Bundespräsident)은 철저히 정치와 거리를 둔다. 대통령의 주요 역할은 특정 정당에 치우치지 않고, 국가적 기념일이나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연설하며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국가의 도덕적 양심'과 같은 역할이다. 대통령은 의회가 선출한 총리를 형식적으로 임명하고, 의회를 통과한 법률에 최종 서명을 한다. 하지만 이는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요식행위일 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처럼 독일이 의도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이 결국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는 역사적 교훈 때문이다.
이탈리아 대통령은 독일과 달리 ‘정치적 중재’ 역할을 수행한다. 이탈리아는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연립정부가 자주 붕괴되는 등 정치가 불안정한 편이다. 이런 환경에서 대통령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총리가 실권을 행사하지만, 정치적 위기 시 대통령의 역할이 부각되고는 한다.
연정이 붕괴되어 국정이 마비되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각 정당의 대표들을 만나 새로운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지 협의하고, 차기 총리 후보를 지명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더 나아가 정당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대통령은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중립적인 전문가(교수, 관료 등)를 총리로 임명하여 위기관리 내각을 이끌도록 하기까지 한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정부 구성의 첫 단추를 끼울 권한을 가진다. 이스라엘 역시 다당제가 특징인 내각제 국가로, 선거 이후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제도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총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은 각 정당 대표들과 협의한 후, 연립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는 국회의원 1명에게 총리 후보 자격을 부여하고 정부 구성 권한을 위임한다. 이는 정부 구성 과정의 첫 단추를 끼우는 매우 중요한 형식적 절차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인종과 종교로 구성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갈등을 중재하고 국민 통합을 호소하는 역할 과, 범죄자에 대한 사면권을 행사한다.
이처럼 의원내각제 국가의 대통령은 '정치적 실권자'가 아닌 '국가적 상징이자 통합의 구심점'이다. 평상시에는 의전적인 역할에 머물지만, 독일의 사례처럼 '도덕적 권위'로 국민을 이끌거나, 이탈리아의 사례처럼 '정치적 위기' 시에 안정적인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등 국가의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이는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할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