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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21) 민주주의의 동학

전략적 선택으로서의 민주주의

by 김광민

행위자 중심이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특정 사회경제적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적으로 도래하는 구조적 필연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그 이후의 공고화 과정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정치 및 사회 행위자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내리는 전략적 선택과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행위자 중심 접근법(actor-centric approach)'은 민주주의의 동학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분석적 틀을 제공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민주화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crafted)' 정치적 과정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 만들어낸 극적인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두 순간, 즉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통한 권위주의로부터의 '이행(transition)'과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를 통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방어(defense)'는 행위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이행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약 37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했지만, 모두 핵심 행위자들의 전략적 상호작용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과 궤적을 규정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첫째, 1987년 권위주의 체제의 붕괴와 민주적 이행은 어떠한 행위자들의 조합과 전략적 계산을 통해 가능했는가? 둘째, 2024년 현직 대통령에 의한 헌정 중단 시도는 왜, 그리고 어떻게 단 몇 시간 만에 좌절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행위자들의 역할은 1987년과 어떻게 달랐는가? 마지막으로, 이 두 사건의 비교 분석은 지난 37년간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 수준과 시민사회의 역할 변화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중요한 지적 여정이 될 것이다.


행위자 중심 이론


1980년대 남미와 남유럽의 민주화 경험을 분석하며 등장한 기예르모 오도넬(Guillermo O'Donnell), 필립 슈미터(Philippe Schmitter), 아담 셰보르스키(Adam Przeworski) 등의 학자들은 기존의 구조주의적 민주화 이론에 도전하며 '전략적 선택(strategic choice)' 모델을 제시했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민주화 과정이 특정 경제 발전 수준이나 계급 구조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들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벌이는 전략 게임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정치적 결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과소결정(underdetermined)'되어 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행위자들의 선택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가 정해진 길 없이,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된다고 본다.


오도넬.jpg 기예르모 오도넬


권위주의 체제의 내적 균열


행위자 중심 이론에 따르면, 민주화 이행은 대부분 외부의 압력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도넬과 슈미터는 "어떠한 이행도 그 시작은 권위주의 정권 자체 내의 중요한 분열의 결과가 아닌 것이 없다"고 단언하며, 정권 내부의 균열을 민주화의 출발점으로 지목했다. 권위주의 체제는 통상 철옹성처럼 보이지만, 경제 위기, 계승 갈등, 정당성 약화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내부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정권은 현상 유지를 고수하려는 '강경파(hardliners)'와 체제의 생존을 위해 제한적인 개혁을 용인하려는 '온건파(soft-liners)'로 분열된다.


온건파는 정권의 정당성 위기를 극복하고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억압을 완화하고 시민적 자유를 일부 확대하는 '자유화(liberalization)'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유화는 민주화(democratization)와는 다르다. 자유화는 권위주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일부 공간을 허용하는 '자유화된 권위주의(dictablanda)'로 귀결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자유화의 문이 열리면 억눌려 있던 야당과 시민사회가 조직화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기회의 창(political opening)이 열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중 동원과 엘리트의 계산


행위자 중심 이론이 초기에는 엘리트 간의 협상이나 '타협(pact)'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론이 발전하면서 대중 동원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대중의 저항, 즉 '민중의 봉기(popular upsurge)'는 엘리트들의 전략적 계산이 이루어지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핵심 변수다. 대규모 시위와 저항은 권위주의 정권에게 억압을 지속하는 데 따르는 정치적, 경제적 비용을 급격히 상승시킨다.


이러한 압력은 정권 내 온건파가 강경파를 누르고 야당과의 협상에 나서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즉, 대중의 힘은 민주화를 직접 성취하기보다는, 엘리트들이 민주화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오도넬과 슈미터는 이러한 대중 동원이 종종 ‘일시적(ephemeral)’인 성격을 띤다고 지적하며, 대중 동원의 열기가 식은 후에는 다시금 엘리트들의 전략적 게임이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를 결정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은 엘리트의 전략과 대중의 압력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동학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 타협을 통한 민주주의의 설계

권위주의 체제의 균열과 4.13 호헌조치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은 '3저 호황'이라는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집권했다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지속적인 정당성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부상했다. 정권은 내각제 개헌을 선호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은 직선제를 고수하며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현행 헌법(대통령 간선제)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정권 내 강경파의 입장이 반영된 조치로,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한 치명적인 '전략적 오판'이었다. 4.13 호헌조치는 온건한 개헌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희망을 꺾고, 오히려 저항 세력이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단일한 구호 아래 결집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로써 정권 온건파의 입지는 좁아졌고, 정국은 강대강 대치 국면으로 치달으며 민주화 세력에게는 결정적인 '기회의 창'이 열리게 되었다.


전두환 호헌조치.jpg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민주화 연합전선의 구축. '국민운동본부’


4.13 호헌조치라는 정권의 강경 대응에 맞서, 이전까지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세력들은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7년 5월 27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등 제도권 야당,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 천주교와 개신교 등 종교계, 그리고 학생운동 세력을 아우르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결성되었다.


국본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반독재 연합전선으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이념과 노선을 가진 집단들을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단일하고 명확한 목표 아래 성공적으로 묶어냈다. 국본은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기획하는 등 6월 항쟁 기간 내내 전국적인 시위를 조직하고 투쟁을 이끄는 실질적인 구심체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이질적인 행위자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전략적 연대를 구축한 것은 6월 항쟁이 전국적이고 지속적인 동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대중의 분노와 거리의 정치. 박종철과 이한열


국본이라는 조직적 구심점이 마련되었지만, 6월 항쟁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두 젊은 학생의 비극적인 희생에서 비롯되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상식 밖의 발표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부검의의 양심선언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진상 규명 노력으로 고문과 조직적 은폐의 실상이 폭로되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고, 국민적 분노에 불을 지폈다.


분노가 들끓던 6월 9일, 바로 다음 날로 예정된 6.10 국민대회를 앞두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에게 안겨 있는 그의 사진은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잠재되어 있던 저항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두 사건은 민주화 요구를 추상적인 정치 구호의 차원에서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분노의 차원으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이전까지 시위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도시의 사무직 노동자들, 즉 '넥타이 부대'와 중산층이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의 참여는 시위의 규모를 임계점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정권에게는 더 이상 물리력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명백한 신호가 되었다.


박종철 추모제.jpg 박종철 추모제


정권의 전략적 후퇴. 6.29 선언의 정치적 계산


전국 33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시위가 절정에 달하자, 전두환 정권은 군 투입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중산층의 광범위한 참여로 시위의 정당성이 확보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 비난을 우려했으며, 군 내부에서도 동원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존재하는 등 억압을 지속하는 데 따르는 정치적 비용은 정권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겉보기에는 국민의 요구에 대한 전면적인 항복처럼 보였지만, 이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기반한 '전략적 양보'였다.


이 선언은 첫째, 군부 강경파의 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하고 정국 불안을 해소했으며, 둘째, 야당에 의해 끌려가던 민주화의 주도권을 집권 세력이 가져오는 효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선제를 수용할 경우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야당 지도자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분열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 것이다.실제로 이후 야권은 분열했고,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결국 6.29 선언은 민주화 이행의 '방식'(직선제)은 양보하되, 그 '결과'(정권 재창출)는 가져오겠다는 집권 세력 온건파의 정교한 전략적 선택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2024년 12.3 계엄 사태: 민주주의의 방어

위기의 서막.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


2022년 5월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내내 낮은 국정 지지율과 거대 야당이 장악한 국회와의 극심한 대립에 직면했다. 야당은 정부 예산안 삭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각종 특검법안의 재추진, 그리고 주요 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 등으로 정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헌정사상 가장 빈번하게 국회 입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며 맞섰고, 이로 인해 국정은 마비되고 정치적 교착 상태는 심화되었다.


여기에 영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은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총체적인 정치적 고립과 위기 상황이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배경이 되었다.


대통령의 승부수. 12.3 비상계엄 선포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윤석열 대통령은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종북 반국가 세력이 국회를 장악"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위협받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포고령 제1호는 국회를 포함한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구금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여소야대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헌법적 절차가 아닌 물리력으로 일거에 타개하고, 행정부의 권력을 극대화하여 국정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초헌법적 시도였다.


과거 군부 쿠데타가 군 내부의 특정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12.3 계엄 사태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현직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인 의회를 무력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친위 쿠데타'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합리적 계산에 기반한 전략이라기보다는, 극심한 정치적 위기감 속에서 나온 위험한 도박(gamble)에 가까웠다.


계엄.jpg 12.3 계엄 당시 계엄군. 사진=뉴시스


결정적 균열. 집권 여당의 반기


대통령의 도박이 성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집권 세력과 국가기관의 절대적인 복종이었다. 그러나 계엄 선포 직후, 가장 예상치 못했고 가장 결정적인 균열이 집권 여당 내부에서 발생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계엄 선포 약 20분 만인 밤 10시 49분경,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정권 유지를 위해 단결했던 집권 세력의 모습과는 질적으로 다른 반응이었다.


한동훈 대표의 즉각적인 반대 표명은 이 계엄이 반헌법적 행위임을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군과 경찰 등 국가 공권력이 계엄사령부의 위법한 명령에 온전히 복종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도덕적 명분을 제공했다. 또한, 이는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부터도 고립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동훈 대표를 비롯한 다수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 헌법적 가치와 민주적 절차를 수호하는 길을 선택한 것은, 계엄의 정치적 동력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 균열은 1987년과 달리, 민주주의 규범이 집권 세력 엘리트들마저도 거부할 수 없는 원칙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였다.


제도와 시민의 합주. 국회와 광장의 공조


집권 여당 내부의 균열은 국회가 초당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간을 열어주었다. 야당은 즉각 의원들에게 국회 소집령을 내렸고, 일부 여당 의원들도 이에 호응했다. 국회는 자정을 넘긴 12월 4일 새벽 1시경 본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상정했고, 국민의힘 의원 18명을 포함한 재석의원 190명 전원의 만장일치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이로써 계엄은 선포된 지 약 2시간 40분 만에 법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제도 정치의 신속한 대응 뒤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있었다. 계엄 선포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참여를 독려하며 즉각 국회가 위치한 여의도로 집결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은 국회 출입을 통제하는 경찰 및 진입을 시도하는 계엄군과 대치하며 "국회를 지켜라"고 외쳤다. 이들의 행동은 국회 안에서 계엄 해제 절차를 밟고 있던 국회의원들에게 강력한 심리적 지지가 되었으며, 계엄군의 물리력 행사를 주저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 1987년 시민들이 민주적 제도를 '만들기 위해' 싸웠다면, 2024년의 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지키기 위해' 국회라는 물리적 공간을 방어했다. 이는 제도 정치와 시민 정치가 민주주의 수호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완벽하게 공조한 '학습된 민주적 대응'의 전형이었다.


1987년의 유산


1987년 6월 항쟁과 2024년 12.3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두 가지 다른 국면, 즉 '이행'과 '수호'를 대표한다. 두 사건의 핵심 행위자, 전략, 그리고 상호작용을 비교하면 지난 37년간 한국 민주주의가 이룬 질적 변화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행위자 중심.png


이 표에서 드러나듯, 가장 극적인 변화는 '집권 세력 내부'와 '입법부'의 역할에서 나타난다. 1987년 집권 세력 내 균열은 권위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이견이었던 반면, 2024년의 균열은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존폐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1987년 국회가 거리의 정치에 의해 추동되는 부차적 역할을 한 데 비해, 2024년 국회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는 핵심 행위자로서 기능했다. 이는 한국 정치가 거리의 투쟁을 넘어 제도적 틀 안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민주적 규범의 진화와 공고화


1987년의 투쟁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적 '제도'를 획득하는 과정이었다면, 2024년의 저항은 그 제도가 사회의 모든 핵심 행위자들에게 얼마나 깊이 '규범'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 2024년 계엄 시도가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국회에서 신속하고 압도적으로 무력화된 과정은, 폭력이나 혁명이 아닌 '제도적 절차'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최종적인 권위를 확보했음을 입증했다.


특히 집권 여당 대표가 대통령의 명령을 '반헌법적'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저항한 것은,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의 지배 원리를 넘어 헌법적 가치와 절차적 정당성을 존중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게임의 규칙'으로 정치 엘리트들에게까지 내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불안정한 이행 단계를 지나 상당한 수준의 공고화 단계에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민주주의가 여러 정치 체제 대안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행위자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경쟁하는 유일한 체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구적 행위자로서의 시민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시민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치의 중요한 행위자로 남아 있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등 주요 정치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특히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누적 1,7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저항을 통해, 시민의 직접 행동이 헌정 질서의 최종 수호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2024년 12.3 계엄 사태 당시 시민들의 신속하고 자발적인 국회 앞 집결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서 가능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를 방어해야 한다는 목표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고 행동에 나선 '학습된 시민성'의 발현이었다. 한국의 시민들은 4년 또는 5년에 한 번 투표권을 행사하는 수동적 유권자를 넘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든 직접 행동을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상시적이고 영구적인 정치 행위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대의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독특하고 강력한 회복탄력성의 원천일 것이다.


장갑차 시민.jpg 12.3 계엄 당시 장갑차를 가로막은 시민. 사민=우싱턴포스트


행위자가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의 미래


행위자 중심 접근법을 통해 1987년의 민주적 '이행'과 2024년의 민주적 '방어'가 모두 거스를 수 없는 구조적 힘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핵심 행위자들이 내린 전략적 선택과 상호작용의 산물이었음을 살펴보았다.


1987년의 민주화는 정권의 전략적 오판이 만든 기회의 창 속에서, 야권과 시민사회가 '국본'이라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두 학생의 희생으로 촉발된 대중적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집권 세력의 전략적 양보를 이끌어낸 결과였다. 이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행위자들의 연대와 투쟁, 그리고 타협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반면, 2024년 계엄 사태의 신속한 좌절은 대통령의 극단적인 선택에 맞서, 민주적 규범을 내재화한 정치 엘리트(특히 집권 여당)와 학습된 민주적 대응 능력을 갖춘 시민들이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연대한 결과였다. 대통령의 명령보다 헌법을 우선시한 여당 대표의 선택, 초당적으로 헌법적 절차를 이행한 국회, 그리고 국회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의 행동은 지난 37년간 한국 민주주의가 이룩한 성숙과 공고화의 수준을 극적으로 증명했다.


결론적으로, 1987년과 2024년의 경험은 한국 민주주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위기 속에서 행위자들의 결단과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고(crafted)' '지켜져 온(defended)' 역동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두 차례의 역사적 격변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은 입증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헌정 중단 시도를 낳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대립의 정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이러한 새로운 도전을 민주적 제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라는, 또 다른 행위자들의 새로운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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