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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민 Apr 15. 2023

(정치학 개론 1.) 오렌지/ 나랭기

서양 중심 사고에 좁아진 시야

오렌지의 원조는 나랭귀     

2008년 박근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었던 이경숙 “미국에 가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어서 오린지라고 하니 알아듣더라”는 경험을 소개했다. 인수위원장으로서 영어몰입교육을 주장했는데, 현재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영어몰입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한국 교육으로는 미국에서 쓰지 못하는 영어만 배운다는 것이었다.


네이블 오렌지

이 위원장의 발언은 곧바로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논쟁도 불러왔다. 바로 ‘원조 논쟁’이었다. 오렌지의 원산지는 일반적으로 인도라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포르투갈을 거쳐 브라질로 전파되었는데, 이 품종을 발렌시아 오렌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19세기 초 브라질에서 씨가 없는 돌연변이 개체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미국으로 전파되어 품종화된 것이 네이블 오렌지다. 네이블은 ‘배꼽’이라는 뜻인데, 꼭지 아래쪽이 배꼽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네이블 오렌지는 발렌시아 오렌지보다 당도가 높고 신맛이 적다. 특히 씨가 없고 껍질이 쉽게 벗겨져 상과로 먹기 좋다. 하지만 발렌시아 오렌지보다 과육이 적다. 과육이 많은 발렌시아 오렌지는 주로 주스용으로 재배되는데, 주스의 수요가 많아 발렌시아 오렌지가 네이블 오렌지보다 많이 재배된다. 하지만 우리가 생과로 먹는 것은 거의 전부 네이블 오렌지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네이블 오렌지만 기억하고는 한다.


발렌시아 오렌지의 생산은 브라질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지만 네이블 오렌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가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오렌지’는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대명사로 통용될 정도다. 이경숙 위원장이 영어 발음을 이야기하며 오렌지/오린지를 사례로 든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정작 오렌지의 원산지는 미국이 아닌 인도다. 심지어 미국은 포르투갈, 브라질을 거치고 거쳐 오렌지가 들어왔다. 그렇다 보니 이경숙 위원장이 미국식 영어 발음의 예로 오렌지/오린지를 든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인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오렌지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 저마다의 이름과 발음으로 불리고 있는데, 본토 발음을 이야기하려면 원산지인 인도, 즉 힌두어 발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힌두어로 오렌지는 나랭기(नारंगी [na:rāṅgi:])다.          


철학의 아버지는 탈레스민주주의의 아버지는 아테네?     

오렌지/오린지 논쟁과 마찬가지로 원조라고 하기 어려움에도 서양의 시각에서 원조 타이틀을 거머쥔 사례는 다양하다. 대부분의 서양철학사 서적은 그리스 이오니아학파(Ionian school)로 시작한다. 탈레스(Thales)는 이오니아학파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근본원리(아르케, arche)를 탐구했는데, 이를 물(水)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아르케를 무규정적인 무한한 것(토 아페이론, to apeiron)이라 생각했다. 다시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인 아낙시메네스( Anaximenēs)는 토 아페이론을 공기(aēr)라고 정의했다.     


이렇듯 이오니아학파의 창시자인 탈레스는 흔히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누군가는 의아함을, 누군가는 당혹함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혼란을 느끼고는 한다. “만물의 근원이 불이냐 물이냐는, 어찌 보면 아이들 농담 같은 아르케에 대한 논쟁이 과연 철학적인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의 기원으로 이오니아학파를 다루고 있으니, 본적인 의문보다는 자신의 이해력문제로 치부해버리고는 한다.     

탈레스

하지만 이오니아학파가 출현한 기원전 6세기 중국에서는 공자(기원전 551~479년), 인도의 붓다(기원전 563~483년)라는 오늘날까지 인류의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 외쳤던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이어야 하는 지극히 서양 중심의 사고에 대해서는 비판적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당혹함은 정치학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오니아학파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5세기 인근 지역인 아테네의 민주주(Athenian democracy)의 때문이다. 거의 모든 정치학 개론서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정치체제로 삼고는 한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제비뽑기로 선출된 시민이 국가 사무를 담당하는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가 실현되었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당시 아테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깊게 들여 본다면 그것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세 기관은 민회(ecclesia), 법원(dikasteria), 500인회(boule)다. 이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 의결기관인 민회다. 주요 공무원의 선출, 선전포고, 외국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 법안의 토와 등 굵직한 국사가 민회에서 논의, 결정되었다. 민회에 참여할 권리는 군 복무를 마친 20세 이상의 성인 남성에게 평등하게 주어졌다. 정족수는 6,000명에 달했고 때에 따라 연간 40여 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법원은 500~600명 규모의 배심원단 결정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배심원들은 30세 이상 남성 시민 중 추첨으로 선발되었다. 민회와 법원의 의사결정은 연설과 반론을 거친 후 투표 때문에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러한 집합적 의사결정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500인회는 민회에 상정될 의제나 법안을 설정하고 폴리스의 일상적인 행정업무도 상당부분 담당했다. 500인회는 각 부족의 시민 중에서 추첨에 의해 구성되었다. 재임기간은 1년이었고 연임은 불가능했으며, 평생 두 차례에 한해 기회가 주어졌다(김주형. 2019).   

  

모든 시민에게 국사에 참여할 기회가 평등하게 보장되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이면을 바라보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 우선 전체 인구의 85% 정도가 시민권에서 배제되었다. 즉, 아테네 민주주의 약 15%의 시민에 의해서만 운영된 제한된 민주주의였다. 시민권이 배제된 이들은 여성, 노예 그리고 외국인 등이었다. 이처럼 다수가 시민권에서 배제되었고, 특히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제도를 과연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다수가 배제된 채 노예제도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민주주의 원형을 실천한 사례라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테네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8세기경 중국 지역의 주나라에서는 영어 republic의 번역어인 공화주의(共和主義)의 어원이 된 ‘공화’ 시기가 있었다.      


아테네 보다 앞선 민주주의의 시도 공화

『사기(史記)』의 「주본기(周本紀)」에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주나라의 려왕(厲王)에 대한 일화가 있다. 려왕은 성격이 포악했고 오만하며 사치를 좋아했다. 때문에 민심은 왕을 외면했고 백성은 왕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소공(召公)이라는 충신은 왕의 폭정을 보다 못해 “백성들이 왕의 통치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며 간언했다. 그러나 소공의 간언에 려왕은 오히려 대노해 위(衛)나라의 신무(神巫)를 불러 백성을 감시하도록 했다. 신무는 백성을 철저히 감시했고 만약 왕을 비난하는 이가 있으면 곧바로 려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면 려왕은 자신을 비난한 백성을 가차 없이 죽였다.     


신무를 통한 려왕의 폭정이 이어지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길을 지나다 서로 마주쳐도 눈짓만 주고받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려왕은 크게 기뻐하며 소공에게 “내가 비판을 막았으니 이제 그 누구도 감히 나를 함부로 비방하지 못할 것이다(吾能弭謗矣 內不敢言)”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공은 물러서지 않고 “그것은 백성의 입을 막은 것에 불과합니다(是鄣之也).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한 일입니다(防民之口 甚於防川). 흐르는 물을 막으면 터져서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됩니다(川壅而潰 傷人必多).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民亦如之)”고 간언했다.     


그러나 려왕은 소공의 충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폭정은 계속되었고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결국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난을 일으켰다. 결국, 려왕은 체(彘) 나라(현재의 산시성 훠저우)로 도망가야 했고 다시는 주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려왕이 체 나라로 도망가자 소공과 주공(周公) 두 상(相)이 정치를 돌보았다. 이 시기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라는 명칭에 대해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다소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려왕이 체 나라로 도망가자 제후에게 추대된 공백(共伯) 화(和)라는 인물이 부재한 천자를 대신해 정무를 맡았다 해서 이 시기를 공화라 한다는 것이다.     


주나라의 공화 시기가 공화제의 어원이 된 것은 백성에 의해 왕이 쫓겨나고, 절대권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여러 재상이 협의를 통해 나라를 통치했기 때문이다. 백성의 힘으로 왕을 몰아내고 백성의 지지를 받은 재상들이 구성한 권력이 협의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형태가 시민의 지지를 통해 형성된 권력이 국가를 통치하는 오늘날 공화제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주나라의 공화가 오히려 아테네보다 더욱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 중심 사고에 좁혀진 시야      

이렇듯 동양에도 충분히 철학적 사고와 민주주의 싹이 움텄음에도 철학의 아버지는 탈레스고 민주주의 모태는 아테네라 여겨지는 것은 지극히 서양 중심적 사고일 것이다. 김치는 일본에서는 기무치, 미국에서는 킴치(kímtʃi), 일본에서는 키무치(キムチ)라고 부른다. 만약 일본의 어느 교수가 “미국에 가서 키무치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어서 킴치라고 하니 알아듣더라”며 영어 발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우리는 김치의 원조는 한국이고 김치(Kimchi)가 맞는 발음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이러한 서양 중심 사고를 통해서는 캘리포니아 오렌지는 볼 수 있지만, 인도의 나랭기는 볼 수 없다. 그만큼 우리 사고의 폭을 좁게 만드는 것이다. 캔자스대학교에서 석사를,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경숙 위원장이 지식이 얕아서 오렌지/오린지를 거론한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고 미국식 사고를 하며 살아온 그에게 오렌지는 보여도 나랭기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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