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로그
"왜 산을 오르는가? “
그 질문을 품고, 어느해 가을, 나는 안나푸르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여정은 마음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밑을 스치는 흙의 감촉,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 설산 위로 스며들던 빛의 결은 시간의 흐름에도 닳지 않고 선명하다. 안나푸르나는 나의 삶에 그저 다녀온 곳이 아니라, 지나온 길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길 위에 내 일부가 머물러 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BC라는 이름은 트레커들에게 오래된 소망 같은 곳이다. 나 역시 언젠가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곳이었다. 그 이름을 가슴에 품고 도착한 네팔에서 8일을 걸었던 시간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내 삶의 결을 새롭게 짜는 과정이었다.
하루하루가 길었고, 걸음 하나하나가 깊었다. 땅의 온도와 돌계단의 굴곡, 허벅지에 스미는 피로감조차 낯설었지만,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처음에는 높은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안나푸르나가 가까워질수록 그 설렘은 긴장감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과연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
그 거대한 산을 향해 발을 떼는 일이 과연 내게 허락된 일인지, 내가 과연 그 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산길 위에서 숨을 돌릴 때마다 나는 그 물음에 자신감을 잃어 갔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조금씩 산과 나 사이의 거리도 좁혀졌다.
히말라야의 산들 가운데, 마차푸차레는 독특한 존재다. 6,993미터. 높이만 놓고 보면 주변의 고봉들에 비해 눈에 띄는 수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두 갈래로 갈라진 물고기 꼬리 형상의 봉우리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을 만큼 강렬했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도, 가까이 다가설 때도, 마차푸차레는 침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 위엄과 경계가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
네팔 사람들은 마차푸차레를 신성한 산으로 여긴다. 그들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지 않는다. 마차푸차레는 등반이 허락되지 않는 봉우리이다. 마차푸차레는 사람의 발걸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지만, 늘 사람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맞이한 일몰 무렵, 마차푸차레는 붉게 물들었다. 바람결에 스치는 빛의 흐름까지도 신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산과 인간 사이, 가깝고도 멀었던 그 거리에서 나는 숨을 가다듬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팔은 히말라야의 품에 안긴 채, 오랜 시간 가난과 함께 살아온 나라였다. 인구 3천만 명 남짓, 1인당 국민소득 240달러, 하루 2달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국민의 80%를 넘는다. 그러나, 막상 길 위에서 마주한 네팔 사람들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난은 삶의 배경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에 새겨진 것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볕에 그을린 얼굴, 허름한 옷자락 아래 숨겨진 손길은 낯선 이들에게도 따뜻했다. "나마스테"라는 인사말 속에는 서로를 향한 존중과 연대, 삶에 대한 예의가 담겨 있었다.
그들에게 신은 머나먼 곳에 존재하는 절대자가 아니었다. 길모퉁이 나무 아래, 돌담에 기대선 아이의 눈빛 속에,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속에도 신은 머물러 있다. 신은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고, 매일의 인사말 속에서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나마스테, 당신 안에 깃든 신께 인사드립니다.”
그 인사는 서로의 삶을 향한 존경이자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은 말이다. 산길을 오르내리며 만난 네팔 사람들은 항상 웃었다. 어깨 위 짐은 무거웠지만, 그들의 웃음은 너무나 흔했다.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의 웃음은 힘이 되었고, 어느새 길 위의 풍경처럼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웃음은 말 한마디 없이도 나눌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환대였다.
네팔의 날씨는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10월에서 5월까지는 건기, 6월에서 9월까지는 우기다. 트레킹에 가장 적합한 시기는 3월에서 5월, 그리고 10월에서 11월 사이다. 이 시기의 하늘은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설산은 있는 그대로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때, 사람들은 신의 영역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제, 안나푸르나를 향해 출발하는 날부터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길을 지나 또 다른 산들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