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어제 같은 오늘이 또 밝았다. 여행길에서는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순서대로 이어지는 듯하지만, 사실은 같은 하루가 모양만 달리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창밖으로 비치는 아침빛은 어제와 다르지 않고, 공기 속에 섞인 냄새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 익숙한 풍경 한편에는 언제나 처음 마주하는 낯선 순간이 숨겨져 있다. 밖으로 나서는데, 전날 바깥에 널어둔 옷가지며 코펠, 버너가 온데간데없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제임스> 형님도, 다른 일행들도 각자 자기 물건이 사라졌다고 웅성거렸다. 혹시 마을에 숨어 있는 좀도둑의 소행인가 싶어 잔뜩 긴장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슬며시 나타나서 우리를 부른다.
“그거 다 여기 있어요.”
어젯밤, 혹시라도 사라질까 봐 미리 치워두셨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길게 뻗어 나왔다. 작은 사건 하나로 네팔 시골 마을의 정서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아침이었다.
몸을 가다듬고, 숙소 마당에 앉아 모닝커피를 한 잔 내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공기 속에 퍼지는 커피 향을 한껏 들이마신다. 한국에서 마시던 그 커피와 같은 커피인데, 이 아침 공기 속에서는 전혀 다른 맛이다. 네팔의 공기가 보태지면 커피 한 잔도 추억의 맛이 된다.
아침은 간단히 빵과 우유로 때운다. 오늘은 어제 내려왔던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야 하는 날이다. 한 번 내려온 길은 늘 두 배로 가파르게 느껴진다.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 걸음을 떼자, 길 한가운데를 점령한 소와 말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다. 사람이 비켜가는 게 당연한 일인 듯, 짐승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제 풀밭에 집중한다. 이제는 이런 모습이 신기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다.
맞은편 능선을 바라보니,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랭이논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아침 햇살에 젖어든 논밭의 선들은 질서와 무질서, 자연과 인간의 흔적이 뒤섞인 시간의 결 같다. 그렇게 많은 손길과 땀방울이 스며들었을 풍경이 눈앞에 있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왜 이토록 가난할까.
지누 갈림길을 지나 촘롱 마을에 닿는다. 고도 2,000미터가 넘는 산중턱에 중학교가 있다는 게 놀랍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침 조회가 한창이다. 줄 맞춰 선 아이들의 동작이 절도는 없어도 생기가 넘친다. 학교 담장 밖 계단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는 아이들도 보인다. 마치 다른 세상의 문턱을 바라보는 듯한, 약간은 부러운 표정이다.
촘롱에서 시누와로 가는 길은 ‘네팔식 플랫’의 진수를 보여준다. 가파른 내리막과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길을 현지에서는 그저 ‘평지’라고 부른다. 길 위의 경사에 마음을 내려놓는 게 이 길을 걷는 법이다. 계곡에서 잠시 쉬며 물소리를 듣는다.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물소리는 어떤 말보다 분명한 위로가 된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시누와로 오른다.
점심은 시누와에서 해결한다. 네팔에서의 식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모험이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틀리고, 입 안에 머금기도 전에 가슴부터 거부 반응을 보인다. 한국에서는 돼지국밥도 거뜬하게 먹던 위장이, 이곳에서는 감자와 계란만 찾는다. 네팔의 독특한 향신료와 기름 냄새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음식도, 냄새도, 사람도 다 품을 줄 아는 배포가 필요하다는 걸 몸으로 배우는 중이다.
식사를 마치고 뱀부로 향한다. 기대처럼 날씨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침 별빛으로 점쳐본 쾌청한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우의는 카고백 깊숙이 넣어두었는데. 결국 비를 맞으며 걷는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어쩐지 네팔의 비는 좀 더 순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도시의 비는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이곳의 비는 걸음을 늦출 뿐 멈추게 하진 않는다.
뱀부에 도착하니 5시가 다 되어간다. 원래는 도반까지 가야 하는데, 비도 오고 길도 미끄러워 포터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그래도 포터 <찬드라>가 미리 도반에 가서 로지를 잡아두었다고 하니, 갈 수밖에 없다. <수거든>과 <탁구>는 전날의 술잔치 후유증으로 한참 뒤처져 오고 있다. 비까지 내리는데 괜찮을까 싶어 걱정되지만, 다른 포터들은 모두 “걱정 말라”라고 말한다.
안개 자욱한 도반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늦었지만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 샤워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보니,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이곳에서는 모두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이다.
카운터 한쪽에 네 자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옆 테이블의 트레커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바라본다. 서로 말은 안 해도, ‘오늘 어떤 길을 걸었나’ 하는 시선이 오간다.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간다. 몸이 지쳐 있을 때는 쓸데없는 말보다 묵직한 이불 한 장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잠이 들었다가 밤중에 문득 눈을 떴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쏟아질 듯한 별들이 가득하다.
밤새 내리던 비가 씻어낸 하늘. 그 하늘 아래, 이 낯선 땅에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 하늘의 별빛이 오늘 하루를 축복하는 것만 같다. 내일도 괜찮을 거라는 조용한 약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