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비가 그친 아침, 밤새 산을 씻어낸 공기는 마치 갓 깨어난 아이의 숨결처럼 신선하고 맑았다. 어제 쏟아진 비는 산과 계곡과 길을 적셨지만, 오늘 아침의 하늘은 그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듯 투명했다. 하늘은 끝없이 높아 보였고, 햇살은 바위 끝에도 스며들어 모든 것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제, 이 길은 내게 남은 마지막 길이다. 오늘, 마침내 그곳에 닿는다. 누룽지 한 사발로 속을 달래고, 두툼한 양말을 신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올라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 어디선가 잔잔한 흥분이 밀려왔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라는 이름은 이제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고, 꿈처럼 아득하던 그 이름이 오늘 걸어야 할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반을 떠나는 첫 발은 유난히 가벼웠다. 몸이 가벼워진 게 아니라, 마음이 가벼워져서였을 것이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지 않았지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고도의 변화가 발끝에서부터 느껴졌다. 공기는 여전히 신선했지만, 그 신선함 속에 미세하게 섞여 있는 묘한 압박감이 폐 깊은 곳을 건드렸다.
히말라야 로지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이곳은 오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끊이지 않는 작은 쉼터였다.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 이미 다녀온 사람과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 서로의 눈을 보며 말을 건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잘 가요.” “안전하게 내려가세요.”
그런 마음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는 듯했다. 블랙티 한 잔을 마시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따금 머릿속이 멍해지고 손끝이 저릿해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이곳의 시간에 나를 맞추자고.
2,500미터를 넘어서면서부터 몸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숨이 짧아지고, 입안이 마르고, 팔다리 끝으로 미세한 전류처럼 불안감이 스쳤다. 고산병은 언제나 경고 없이 찾아와 온몸에 자리를 튼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걸음을 늦추고, 한 발 디딜 때마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몸과 대화했다. 멈추지 않는 것과 무리하지 않는 것, 그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는 일이 고산 트레킹의 전부였다.
힌쿠동굴을 지날 때쯤, 드디어 MBC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워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산길은 언제나 눈의 착각을 즐긴다. 발걸음은 갈수록 무거워지고,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멀리 보일 때는 설레지만, 가까워질수록 길은 늘 길어진다. 산은 늘 그렇게 자신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빙하가 깎아 만든 U자형 협곡을 따라 걷는 동안, 세상의 소음은 모두 사라졌다. 바람 소리와 발소리, 숨소리만이 함께 걷는 유일한 동행이었다. 이곳에서 인간은 풍경에 묻힌 존재였다. 나의 몸이 산의 일부가 되는 순간, 나도 풍경 속에 흩어지는 돌멩이 하나, 바람 한 줄기가 되는 듯했다. MBC에서 내려오는 트레커들과 마주쳤다. 얼굴마다 피로와 성취감이 뒤섞여 있었다.
“나마스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사말은 여기서 더욱 빛났다. 그 말속에 이 길 위에서 버텨낸 모든 숨과 걸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았다. 조금만 더 가면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고도가 높아질수록 숨은 더 거칠어졌고, 걸음은 더 느려졌다. 그러나 그 느린 걸음은 자연스레 산의 시간과 맞아떨어졌다.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 한 몸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발이 디디는 땅, 손끝에 닿는 바람, 눈앞에 펼쳐진 능선과 봉우리, 모두가 나와 분리되지 않았다. 나는 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길이 나를 데리고 가고 있었다.
마차푸차레는 어느 순간 안갯속에서 나타났다.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영. 그것은 산이라기보다 신의 표정 같았다. 말이 필요 없는 존재.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 두근거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였다. 마차푸차레를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게 된다. 어떤 산은 오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산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되는 것임을.
ABC로 향하는 길은 완만했지만, 오히려 그 완만함이 이곳의 특별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사이, 그 중간쯤에서 길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야생화가 피는 계절이 아니었지만, 바람과 풀과 하늘만으로도 충분한 풍경이었다. 마치 자연이 인간에게 내어준 마지막 자리 같았다.
마침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도 위의 좌표가 아니라, 이제 내 삶에 새겨진 좌표였다. 로지에서 짐을 풀고,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설산 앞으로 나섰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지만, 그 바람은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연과 내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만 같았다.
해가 저물며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는 붉게 타올랐다. 저녁 빛이 산의 어깨에 내려앉고, 하얀 설산이 붉은빛으로 물들 때, 나는 그저 숨을 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순간, 어떤 감동은 설명하지 않고 그냥 가슴에 묻어두는 것이 맞다.
저녁 식사 때 쿠쿠리 럼 한잔을 마셨다. 기쁨과 안도감이 섞인 술 한잔. 그러나 몸은 더없이 정직했다. 기침은 깊어졌고, 속은 매스꺼웠고, 고도는 밤이 깊어질수록 온몸을 짓눌렀다. 화려한 풍경과 대비되는, 고단하고 솔직한 밤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자연이 내게 건넨 선물 같았다.
자연과 내가 이렇게 가까워진 순간은, 처음이었다. 안나푸르나는 내가 바라보던 대상에서, 내가 스며든 공간이 되었다. 그 밤, 나는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