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정확히 몇 번을 뒤척였는지 모를 긴 밤이었다. 기침은 깊어졌고, 속은 헛헛하고, 머리는 텅 빈 듯 무거웠다. 잠이라는 건 아예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창밖의 밤공기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해발 4,130미터, 산꼭대기 롯지의 얇은 벽 너머로는 바람과 침묵뿐이었다. 밤은 무심했고, 몸은 자꾸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직은 버텨야 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창틈으로 새어드는 희미한 빛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이었지만, 저 너머, 산등성 어디쯤에서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을 터였다. 5시 10분에서 5시 30분, 그 짧은 시간에만 만날 수 있다는 마법 같은 풍경.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옷을 껴입고, 모자와 장갑, 머플러까지 동여매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는 가히 살을 에는 수준이었다. 폐 깊숙이 들어온 찬 공기가 가슴속까지 얼려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 어둠과 추위를 견디며, 저마다의 감각으로 안나푸르나의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추위에 덜덜 떨렸지만, 시선은 온통 능선 끝에 고정됐다. 새벽빛은 한 점 붉은 선으로 능선 끝을 물들였다. 그 붉은 기운이 천천히 산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안나푸르나의 눈부신 설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빛은 다시 투명한 금빛으로, 이어 순백으로 바뀌며 산 전체를 감쌌다.
그렇게 한동안 산 앞에 서 있었다. 말도, 생각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사진은 그 웅장한 순간을 제대로 담을 수 없었다. 눈과 가슴에 새겨둔다고 해도, 이 감각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충분히 보고, 충분히 머물고, 충분히 이 순간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품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남아 있던 스팸 한 토막과 김치 몇 조각으로 끓인 찌개는,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한 끼였다. 뜨끈한 국물 한 모금에 얼었던 속이 풀리며, 비로소 몸이 깨어났다. 오늘은 ABC에서 MBC, 데우랄리, 도반을 지나 시누와까지, 긴 하산길이 이어지는 날이다.
오전 9시,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올 땐 마냥 멀고 가파르기만 하던 길이, 내려갈 땐 한결 다정해 보였다. 정상에 다녀왔다는 안도감과 성취감 때문인지, 발걸음에도 자연스레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산과 나, 길과 나 사이의 관계도 조금 달라졌다. 온 힘을 다해 맞서던 상대에서, 이제는 어깨동무를 한 동행자처럼 느껴졌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늘었다. 안나푸르나는 멀어질수록 더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헤어질 걸 알면서도 자꾸 돌아보게 되는 사람처럼,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두었다. 눈앞의 풍경은 변해가는데, 마음은 여전히 저기, 저 설산 아래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었다.
히말라야 롯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감자 몇 조각과 블랙티 한 잔. 따뜻한 차 한 모금에 쌓인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도반을 지나 뱀부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이미 다리가 알아서 길을 기억하고 있는 듯,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길가 풍경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나뭇가지에 걸린 당나귀 방울 소리, 계곡 아래 빨랫줄에 걸린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 마당에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올라갈 때는 한 번도 귀에 들어오지 않던 소리들이 내려가는 길엔 그렇게 선명하게 들렸다.
시누와에 도착할 무렵,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롯지 앞에는 크고 작은 등불들이 밝혀지고,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부터 디하르 축제가 시작된다는 소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아이들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대 위에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축제의 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어느새 내 목에도 메리골드 꽃목걸이가 걸렸다. 아이들은 손을 끌어당기며 함께 춤추자고 했지만, 몸치 본능이 발목을 붙잡았다.
“난 박수 담당이야.” 하고 손사래를 치자, 아이들이 깔깔 웃는다. 무대 위보다 무대 밖이 더 신나는 축제. 가벼운 웃음과 박수, 어깨를 두드리며 건네는 ‘나마스테’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었지만, 창밖에서는 여전히 북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다리도, 어깨도, 마음도 가벼웠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 내려온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밤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축제의 웃음을 베개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