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시누와의 아침 공기는 확실히 다르다. 고도 2,360미터에서 자고 나니 숨도 덜 가쁘고, 몸도 가뿐하다. 산에서 내려온 공기는 밤새 식어 있다가, 아침 해가 산등성이를 넘을 때쯤부터 조금씩 풀린다. 저 아래 계곡에서 올라오는 물안개와 맞물려 새벽 공기는 촉촉하고 부드럽다.
온몸을 감싸는 공기가 가볍게 느껴지니, 마음마저 덩달아 가벼워진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길이 누적된 피로 대신 묘한 여운을 남긴 덕이다.
아침식사로는 언제나처럼 익숙한 메뉴, 빵과 차. 처음엔 아쉬웠던 소박한 한 끼가 이제는 심심한 맛 그대로 입에 맞는다. 산에서는 배를 채우는 일이 대단한 의식일 필요가 없다. 그저 걸을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충분하다.
아침을 마치고 시누와를 떠나려는 순간, 문득 발길이 느려진다. 이제 내려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올라올 때는 힘들어 죽겠다고 했던 길인데, 돌아서는 순간부터는 그 길이 왠지 아쉽고 그립다. 발걸음은 가볍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무겁다. 산을 떠나는 일이 이토록 아쉬울 줄은 몰랐다.
길은 지누로 내려간다. 시작부터 기세등등한 내리막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길로 올라왔으면 어땠을까' 싶어 뒤돌아보는데,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냥 지금 내려가는 길에 집중하기도 벅차다.
돌계단은 급하고, 걸음마다 무릎과 발목에 전해지는 충격이 가볍지 않다. 그런데 이 계단을 마을 사람들은 맨발로 오르내리기도 한다니,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계단 한쪽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아침부터 바쁘다. 손에 든 빗자루로 계단 사이사이를 쓸고, 바위틈에 난 풀을 손으로 뽑아내는 모습이 정겹다. 산속 마을에서 길을 지키는 일은 그저 길을 닦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가꾸는 일처럼 보인다. 손때가 묻은 길은 그 자체로 삶의 일부다. 지나가는 우리야 그저 흙길 하나 밟고 지나가지만, 이들에게는 삶을 이어주는 끈 같은 곳이 바로 이 길이다.
아이들은 어느새 우리 앞에 나타나 “스위트, 스위트!”를 외친다. 마치 대문 없는 집 앞마당을 지나가는 손님에게 인사하는 동네 꼬마들 같다. 배낭 한쪽 주머니에서 초코파이와 사탕을 꺼내 건네주자 아이들은 마치 보물이라도 받은 듯 얼굴이 환해진다. 주고받는 이 짧은 순간이 참 따뜻하다.
네팔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나마스테'라면, 가장 많이 건넨 물건은 아마도 이 작은 간식들일 것이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아이들은 능숙하게 포즈를 취한다. 이 순간만큼은 초코파이 광고 모델보다 더 귀엽고 당당하다.
촘롱에 도착해 블랙티 한 잔을 마시며 숨을 돌린다. 내려올 때는 훨씬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막상 발걸음을 멈추고 나니 왠지 허전하다. 여정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이 문득 가슴을 찌른다.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그 하얀 능선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찻잔을 들고 멍하니 산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축제 기간이라서인지 길목마다 아이들이 가득하다. 손에 메리골드로 엮은 화환을 들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붙잡아 노래하고 춤춘다. 꽃잎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며 싱글벙글하는 얼굴들이 참 귀엽다. 사람 사는 모습이 어디든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무대를 즐기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기꺼이 지갑을 연다. 돈을 준다기보다, 그들과 함께 작은 축제에 동참하는 기분이다.
뉴브리지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다. 산 아래로 내려올수록 음식 맛도 조금씩 친근해진다. 초반의 낯선 향신료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던 날들이 무색하게, 오늘은 맥주 한 캔을 곁들이며 여유를 부려본다.
다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마을에서는 벼 말리는 손길이 분주하다. 나뭇가지에 널어둔 곡식들이 햇볕 아래서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우리 시골집 마당에 가을볕 아래 마른 벼들이 떠오른다. 삶의 방식은 달라도,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손길은 어디서나 닮아 있다.
뉴브리지에서 이어지는 길은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마치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기분이다. 돌계단이 이어지고, 작은 마을을 지나고, 골목을 돌아 나갈 때마다 문득문득 고향 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익숙한 풍경이 트레킹의 끝자락을 실감하게 한다. 네팔의 산과 들은 이방인에게조차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심어준다.
오늘 밤은 톨카에서 묵는다. 트레킹 중 마지막 밤이다. 로지 앞마당은 마치 정원처럼 단정하게 가꿔져 있다. 마당에 서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보며, 여기까지 온 시간들을 되짚어본다. 정든 곳을 떠날 때의 기분은 언제나 복잡하다.
이제 내일이면 이 길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 길에서 만난 풍경, 사람들, 숨결 같은 순간들은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 한밤중에 문득 깨어나면, 이 길의 바람과 냄새가 떠오르겠지. 로지의 창밖으로 흐르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