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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트레킹 후, 다시 시작되는 일상

11월 6일

by 오시리스 김일번


트레킹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톨카의 아침 공기는 어딘가 다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젠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새벽 공기 한 모금에도 괜히 마음이 설렌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기는데, 포터들도 이젠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어색했던 그들과의 관계가, 어느새 말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서로를 챙기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길을 나서자, 마을길을 따라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를 동네 강아지들이 졸졸 따라온다. 사람이든 개든, 이 작은 마을을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건 매한가지인 듯하다.


얼마 가지 않아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피탐데우랄리까지는 제법 숨이 차오르는 오르막이다. 8일째라 몸이 어느 정도 적응한 줄 알았건만, 산은 끝까지 인간에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피탐데우랄리에 도착해, 이제는 익숙한 블랙티를 주문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블랙티 맛이 유난히 달고 깊다. 찻잔 속에 녹아드는 굵은 설탕 한 스푼이 오늘따라 한결 정겹게 느껴진다. 이젠 커피보다 블랙티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트레킹 내내 힘들 때마다 마셨던 블랙티는, 몸을 녹이고 마음까지 풀어주는 일종의 '위로' 같은 존재였다. 이제 이 맛이 그리워질 것 같다. 찻잔을 손에 쥔 채 능선을 따라 펼쳐진 설산들을 바라본다.


가이드 수거든이 한 봉우리 한 봉우리 이름을 불러준다. 안나푸르나 사우스, 히운출리, 안나푸르나 1봉, 신거줄리, 마차푸차레, 안나푸르나 4봉, 안나푸르나 2봉, 럼중히말, 마나슬루... 봉우리마다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듯 시선을 옮기는데,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진다.


이 이름들을 다시 부르게 될 날이 있을까, 아니면 오늘이 마지막일까. 그 생각에 한 번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욕심이 든다.


포타나로 가는 길은 설산을 양옆에 두고 걷는 능선길이다. 이제야 비로소 네팔의 산길을 온전히 즐기는 기분이다. 멀리 늘어선 설산들이 마치 배웅을 나와준 것처럼 느껴진다.


가는 길에 퍼밋 체크를 마치고, 오스트레일리안 캠프로 향한다. 예전에 호주 사람들이 이곳을 야영지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호주 사람들 보는 눈이 꽤 있었다. 설산 조망은 여기서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른 들판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야영지에서 하룻밤 묵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별이 쏟아질 밤하늘 아래에서 저 설산들과 나란히 숨을 쉬는 밤이 얼마나 특별할까.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텐트 하나 치고 온전히 이 풍경과 시간을 나눌 수 있기를 마음속에 고이 새겨둔다.


캠프를 지나 담푸스로 내려가는데, 길섶에 심어놓은 메리골드가 눈길을 끈다. 네팔 사람들은 왜 이토록 메리골드를 좋아할까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알 것 같다. 축제 때마다 문 앞에 걸고, 신에게 바치고, 손님에게 걸어주는 꽃이 바로 이 메리골드다.


꽃 한 송이에도 그들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메리골드가 더없이 따뜻하고 환한 빛으로 다가온다.


담푸스에서 점심을 먹고, 마지막 목적지인 페디로 향한다. 가을빛 가득한 들녘을 지나며, 가을볕에 벼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풍경 속을 걷는다. 어디선가 낫질 소리가 들리고, 볏단을 나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산속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또 다른,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이다.


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그동안 만났던 네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아이들, 길가에 앉아 수줍게 웃던 할머니, 블랙티 한 잔 건네며 눈웃음 짓던 롯지 주인아저씨까지. 그 얼굴들이 이 길 위의 풍경만큼이나 또렷하게 가슴에 남는다.


급경사 길을 내려오자 마침내 도로가 보인다. 익숙한 문명의 흔적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기쁘면서도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포터들과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고, 그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인사를 나눈다.

8일 동안 고생한 짐꾼이자, 동료이자, 때론 선생님이었던 그들과의 이별은 생각보다 훨씬 아쉽다.


포카라로 돌아오니, 마침 축제기간이다. 도시 곳곳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한껏 들떠 있다. 페와호수를 천천히 걸으며, 이번 트레킹의 마지막 장면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낮술'이라는 한국 식당으로 향한다. 삼겹살과 소주 한 잔, 그렇게 익숙한 맛으로 8일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소주값이 비싸다고 투덜대면서도, 한 잔 두 잔 따라가며 서로의 수고와 추억에 건배한다.


마지막 잔을 비우며, 다시 네팔을 찾을 날이 올까 생각해본다. 이 길과 사람들, 산과 하늘,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발걸음은 포카라로 향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저 설산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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