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시작
혼자 글을 쓰는 것이야 숱하게 해오던 일이지만, 남이 볼 거라고 생각하고 글을 남긴 적은 없다. 기껏해야 나의 추억용도로 혹은 교훈을 기억하기 위해 남기던 일이다.
지금같은 디지털 시대에 노트를 바리바리 챙기는 사람이 바로 나다. 깨달음을 적는 다이어리, 일정을 남기는 몇 매 안 되는 작은 노트, 그림을 그릴 때 좋은 도톰한 드로잉북, 급할 때 챙겨가기 좋은 손바닥만한 스프링 노트를 모두 쓴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의 아날로그 사랑은 더욱 심해졌다.
한 시간 일을 한다면 50분 일하고, 10분은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하고 눈도 쉬어줘야 합니다. 가끔은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 나타나 50분마다 다들 일어나라고 외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다함께 국민 체조를 하는 것이다. 팀장님들의 분쟁도 멈추고, 엉덩이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의 번식도 막는 거다.
회사의 의자는 청소를 주기적으로 하는 걸까? 주말이면 대규모로 청소직원이 와서 사무실 전체를 무시무시한 진공 청소기로 휩쓸어 주기라도 하는 걸까. 서랍에서 꺼내먹던 간식들이 의자의 푹신한 매쉬 아래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 5일 씩, 매일 8시간씩 따끈한 엉덩이로 품어주기까지 하다니. 버섯이 안 자라는 게 신기한 게 아닌가.
아무튼 이런 상상을 한 시간에 한 번씩 하면서 노트를 펼친다. 업무가 아닌 다른 화면을 켜놓기에는 너무나 눈에 튀니깐, 열심히 인사이트를 적는 척 망상을 노트에 열심히 끄적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여행을 많이 가본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여행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일상에서도 충분한 행복을 찾는다. 자주 가는 공원에 등나무가 활짝 피어있다든가, 밤에 나무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가 열심히 농구연습을 하는 소리를 듣는다든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강변을 걷는다든가하는 모든 일이 행복하다. 주말이면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아하는 작가의 북토크에 가는 것도 신선한 도파민이다.
이대로도 너무 행복한데 꼭 어딘가를 떠나야 할까? 라는 질문이 계속 들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휴가 때 여행을 상상하며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 매번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 나는 그 속에서 공감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 여름에 여행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유는 명료하다. 지금아니면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엇을 얻고 싶어서나 대단한 열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이 여행가기 딱 좋은 시기였다. 차차 이야기를 풀어보겠지만... 이렇게 아무 기대와 준비와 이유없이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