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일찍 결혼하는 것이었다.
26살, 꽃다운 나이에 우리는 빠르게 사랑했고, 아파했다.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우리의 아이가 스무 살 되는 해,
7년 뒤 우리는 이혼합니다.
내 인생 최대의 목표는 결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앞으로 결혼 가능성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스무 살이 된 후 대학교 입학, 군대, 졸업, 취업까지 모든 상황을 노트에 적었고,
월 수입을 가정했을 때 내가 결혼할 수 있는 적정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그 결과는 32~35살에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물론 내가 가정한 모든 상황을
100% 달성했을 때의 결과라 자신감이 떨어졌다. 난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특출 난 특기가 없었으며, 정말 이 세상에서 지극히 보통, 또는 그 이하쯤 되는 사람이었다.
미래가 안 보이던 시절
집안 형편은 내가 커가는 시절에 비례해 나빠졌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셨지만,
그 당시 많은 가정에게 고통을 안긴 '보증'의 피해를 우리 가족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사립대는 무리였고,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바로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해서 회사를 가는 것보다 어떤 기술을 배우고 싶었고, 기술을 배우면 왠지
평생 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수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상담을 한 뒤,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대학교를 자퇴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있으셨고, 복학해서 대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어렴풋이 그때 인기 있던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빵 먹는 걸 좋아하는데, 그러면 내가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고, 만들어서 안 팔리면
그냥 내가 먹고살아야겠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푹 빠져 지냈던 시기였다.
'모모'와의 만남
어느 날, 같은 과 동갑인 여학우에게서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게 되었다.
"아르바이트할 곳 찾는다며? 나도 지금 아르바이트 찾고 있는데, 혹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내 친구가 거기서 일하는데 사람 구한대서.. 같이 해보자!"
그 당시 나는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내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주유소나 일반 식당에서는 일을 해봤지만 스테이크를 파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점이 약간 망설임을 주긴 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함께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여학우는 "모모"라고 하겠다.)
모모와 나의 생활 패턴이 같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모모는 오전 잠이
너무 많아서 항상 깨워줘야만 일어났는데, 무려 전화를 50~70통을 하면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일을 같이 하면서 수업도 같은 시간으로 맞추고, 학교에서도 계속 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모모'를 사랑해...
모모가 이성으로 보인건 같이 일을 하며 하루의 모든 일정을 함께했기에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 예쁘장한 얼굴, 똑 부러지는 말투, 여자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아 안심인 모모의 모습에서
단순히 친구보다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고, 다행스럽게도 모모도 나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주었다.
우리는 약간의 썸을 타면서 썸보다는 조금 더 깊은 관계까지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확실한
연인사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시기가 있었다.
모모는 생각보다 힘든 상대였다. 나보다 지적 능력이 높은 생물이었고, 나한테는 약간의 차가운 도시녀
같기도 했다. 더치페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연인 사이가 아님에도 연인처럼 싸우기까지 했다. 아마도 싸우기 시작하면서 반대로 모모가 나를 더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모가 만난 남자 중 내가 가장 힘든 상대였다고 하는 거 보면 나도
나만의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모모의 과거 남자들은 모두 자기한테 충성스러웠다고 했다)
서로가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바로 사상은 비슷했다.
성향은 달라도 사상이 같기에 대화를 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너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여자를 나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우리 그냥 동거하자. 너도 자취를 해야 된다면 그냥 나랑 같이 살자. 그게 돈 아끼는 거야"
이 한마디에 우리는 26살에 동거와 결혼을 계획하게 되었다.
속전속결 결혼과 육아, 그리고 현실
모모의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동거와 결혼을 허락받았다.
동거를 위해 혼인신고를 했다.
1년 뒤 우리는 결혼했다.
모모가 임신하고, 출산하고, 육아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잦은 야근으로 모모가 거의 독박 육아를 했다.
주변에 부모님이 안 계셔서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으니 정말 힘든 시기였다.
나는 돈을 번다는 이유였지만 모모는 서러웠고, 그렇게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에 비해
현실은 고통이었다.
결혼 생활은 갈등과 화해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마음은 더욱 아팠고,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듯 13년이 지났다.
좋은 날이 지속되다가도 한순간 단 한마디의 오해와 실수로 부부싸움이 이어졌고,
그러한 갈등에 지쳐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서로의 대화가 많아질수록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 태도,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은 너무 달랐다.
10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아왔지만 융합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7년 뒤, 우리는 이혼합니다.
이번 브런치북 연재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하나의 도구이다.
대학 시절의 추억과 조건 없는 사랑에서 지금은 서로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채 순수한 존재가 아닌
꾸며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혼인이라는 계약으로 평생을 붙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사람에 따라 축복일 수 있지만, 불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아이가 스무 살이 되는 7년 뒤, 서로의 책임을 다한 그때,
그 해는 우리 가족이 앞으로 남은 삶을 좀 더 가치 있고, 신뢰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실험적 도전이자 다짐으로써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