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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만주 May 08. 2023

사회적 약자가 되다

 


“지능지수 50... 자폐성 장애에 따른 지적장애가 보이고..따라서 자폐성 장애 심한 장애로 판정합니다. ” 


큰 아들의‘장애 정도 결정서’를 전달 받았다. 6년 전, 6살 아들이 첫 장애 판정을 받은 후 재검사를 준비해왔다. 신도시가 여럿 생기는 시간 동안 ‘결정서’내용만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애써 외면하고 싶은‘흉터’를 붕대로 친친 감아놔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있다고 안도하는 내게“그건 감출 수 없는 네 상처야!’라고 야박하고 냉정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씁쓸했다. 아들은 변한 게 없는데 내 마음만이 바람을 탓하고 있었다. 


아들의 장애는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이 장애로 고독감을 느낄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보이는 대로라면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할지 그 깊이까지 내가 알 길은 없다. 우리 주변에‘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과 다른 점은 내 아들은 그가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 안에 중증 장애인이 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서서히 끓고 있는 물 속 개구리를 상상해 본다. 서서히 끓고 있어 알아채지 못하다 어느 순간 통점으로부터 ‘보통 일’이 아닌 것을 깨닫는 가여운 개구리를. 이정도면 견딜 만 하다며 유유히 유영을 즐기다 가끔 이‘결정서’와 같은‘제도’에 끼워 맞추야 살아야 할 때, 나는‘보통 일’이 아닌 내  처지가 새삼 아뜩해진다.  


사람은 살면서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 변화의 기회를 맞는다. 그런 면에서 큰 아들은 내게 특별한 타인이다. 지금도 아들은 알 것 같아도 알 수 없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미한 존재이다. 아들과 살며 제법 손발이  맞아 보이는 지금의‘변화’에도 종종 힘든 상황을 맞이하곤 한다. 그 자신도 빠져 나오고 싶을지도 모르는 세계에 잠길 때와 패턴화된‘그’에게만 의미 있는 반복 행동은 또 다른 자폐아인‘나’의 세계와 충돌을 빚으며 때때로 내 감정은 상처를 입는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변화도 있다. 첫째는 아들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내 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함을. 아이는 변하지 않는다.  그저 내 마음에 따라 아들이 멀리 도망갈 수도 있고, 완벽한 이해의 대상이 될 수 도 있다. 내 마음이 성난 파도이면 아들은 부침하는 쪽배이고, 물비늘이 번뜩대는 잔잔한 호수와 같다면 그는 평온한 나룻배가 된다. 

아들은 발달 장애인이기 전 인간이었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나부터 돌아 봐야 하는 단순한 진리였다. 


내 감정이 동요하고 소용돌이 쳐 아들을 미워할 지경에 이르면 나는‘너가 많이 힘들구나, 그래서 화가 나 있구나, 그럴 수 있어!’하고 깊숙한  내면의 소리에 위로받고 심호흡을 조심스럽게 시작한다. 아들에게 핸드폰을 놀잇감으로 쥐어 주고, 극도의 이기성을 발휘해 오로지 내 감정에만 집중한다. 여유를 되찾으면 아들에게 더 잘해 줄 뿐이다. 


둘째는 애써 외면하며 살 수 도 있었던 반쪽 세상을 응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문명사회에서 관심과 보호, 경우에 따라 배려와 양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데 우린 그들을‘사회적 약자’라 한다. 사회적 약자와 관계없다고 살아 온 내게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거울 뉴런 덕분에 이성적 공감은 했으나,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서야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듯 아들을 만나면서 사회적 모든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 정서적 공감을 하게 되었다. 


사회는 필요에 따라 들어 주고 싶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만 선택해 듣는 것 같다. 그들이 소수이고 약자기이기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 때로는 사회가 그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약속도 손바닥 뒤집듯 어겨도 되는 집단으로 치부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장차연’(장애인차별연대)의 지하철 시위를 애먼 시민들에게 피해만 주는 비상식적 행동으로 보지 않는다. 또 발달 장애인을 혼자 돌보던 부모가 삶의 의미를 둘 곳을 찾지 못해 그들과 함께 자살을 선택을 하는 행동을 ‘죽고 싶으면 자기 혼자 죽지!’라고 냉소하지 않는다. 


그들의‘이상 행동’으로 보이는 절규는 책임을 방기하고 약속을 져버리는 사회에 물음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이제는 사회가 그들의‘이상행동’에만 지탄을 보내는 것에 안타까워 할 줄 안다. 아들과 내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혜택은 그들의 절망과 좌절 속에서 힘겹게 일궈낸 투쟁의 산물임을 알아가고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 곱추로 태어나서 부모에게마저 못난 괴물 취급을 당하고 사랑할 권리마저 빼앗긴 벌레 취급을 당했지만 굳건히 삶을 버텨낸 목수 장인공 조병수가 나온다. 그의 말이 새삼 위로가 될 뿐이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인간관계는 끝날 때까지 꾸준한‘노력’이 필요하다. 적절한 가면을 바꿔가며, 나만의 관계 매뉴얼을 만들어 아들과 서로 맞추며 살면 그만이다. 지피지기 백배공감.  아들과 사는데 불편은 있어도 불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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