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노이 민언냐 Dec 07. 2021

아이비리그 뺨치는 박터지는 국제 학교 입학기

일러스트 by 하노이민언냐


2019년 8월 13일    


입학시험을 치는 게 아이들이 아니라 차라리 나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긴장되고 전날 잠도 오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세상은 영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도 많은 영어유치원 출신의 영어 엘리트들이 넘쳐났다. 이상했다. 영어 강사로 있을 때도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영어 유치원을 다녔던가… 14년 영어강사의 경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쩡이와 쭌이처럼 영어라고는 생전 안 하다가, 초등학교 방과 후로 영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랑의 주재원 동기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     


“ 파닉스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참고로 내 새끼들은 숲 유치원 출신으로 빨래집게 놓고 A도 모르는 그야말로 영어 까막눈이었다. 영어 유치원을 보낼걸 하는 뒤늦은 후회로 밤을 지새웠다. 모국어를 먼저 해야 외국어도 잘 익힐 수 있다는 나의 교육 신념이 통째로 휘청거렸다.    

첫날은 콩코디아.    

대망의 콩코디아 입학시험이 왔다. 콩코디아는 학생의 인종 비율을 지키기로 유명했다. 한국인 주재원 가정이 많아지다 보니 국제 학교들은 한국인이 과반수가 넘는 일이 흔했다. 하여 콩코디아는 하노이의 국제 학교들 중 SKY에 맞먹는 난이도와 인기를 자랑한다. 아이들이 시험을 치는 동안 부모들은 교장선생님과의 면담을 해야 했다. 면담하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아이들도 시험을 다치고 나오자 스스로 잘 친 거 같다고 했다. 표정이 아주 밝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주관적인 말은 걸러 믿어야 하는 법이다. 우린 속고 말았지만 말이다. 특히 수줍음이 많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오래 걸리는 우리 쩡이를 많이 걱정했다. 하지만 쩡이도 시험 치는 내내 너무너무 재밌었다고, 이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에 안심이 되었다. 쩡이도 쭌이도 콩코디아에 다니고 싶다고 많이 들떠 있었다.    


교장선생님과의 대화는 30분가량 진행되었다. 그녀는 학교 근처에 골프장이 있으니 골프도 치고 아이들 픽업도 오기 좋다고 했다. 골프에 대해 신랑과 한참을 얘기했던 것 같다. 물론 '골알못'인 나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런 대화가 오갈수록 이미 입학이라도 한 듯 콩코디아에 마음이 더 기울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의 동산이 이렇게 보였을까. 콩코디아는 우리에게 에덴의 동산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마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서 곧 쫓겨난다지.        


“See you soon.”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금방이라도 다시 만날 듯 윙크를 날리며 인사를 하던 교장선생님! 가슴이 두근댔다. 절실할 때 우리는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희망을 품곤 한다. 그때 우리가 딱 그랬다.   

 

“우리 된 거 아니가?” “영어유치원 나온 애들만 뽑는다는데, 우리 애들이 되면 진짜 대박이다.”  

  

온 가족이 소풍 전날의 아이들처럼 들떠있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깨를 들썩이며 떠들었다. 그때의 나, 부끄럽구나. 남편과 나는 콩코디아를 이미 합격이나 한 듯 승리감에 취해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콩코디아의 교복을 입은 쭌이와 쩡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는 한국인 선생님께서 학교시설을 안내해 주셨다. 헤어지기 전에 합격 여부를 이메일로 알려 주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각자의 휴대폰을 1분 단위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soon’이 어느 정도의 ‘곧’인지 콩코디아에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리고 둘째 날, BIS를 향했다.

대학교 버금가는 큰 규모에 우리들은 압도당했다. 한국인 선생님께서는 우리 가족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시험에 대해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쭌이와 쩡이는 각각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꾀 오랜 시간을 걸려 시험을 치게 될 거라고 선생님께서 귀띔해 주셨다.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쩡이가 눈물범벅이 되어 나왔다. 한국인 선생님께서도 이런 유정이를 보며 적잖이 당황하신 듯했다.     


이게 대체 머선일이고?    


왜 우느냐고 다그치는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훌쩍거리는 쩡이에게 물었다. 쩡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숨죽여 울기만 했다. 알고 보니 초반 몇 문제는 파닉스에 대한 문제라 제법 자신 있게 풀었단다. 그런데 대 여섯 문제를 푸니 헷갈리는 문제가 나와 감으로 위태위태하게 풀었다. 다시 열 문제가 넘어가니 아예 듣지도 못한 문제들이 쏟아지더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당황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만 7세의 초등 1학년들의 영어시험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겠냐며 쩡이 앞에서 여유를 부리던 우리였다. 실제로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쩡이를 달랬고 쩡이 또한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BIS의 초등학교(세컨더리는 따로 나누어져 있다.) 교장선생님이신 Ms.Carol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나오셨다. 쩡이는 울었던 여파인지 Ms.Carol의 간단한 인사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뚱해 있는 딸을 보자 나와 남편의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망. 했. 다.’    


Ms.Carol은 직접 쭌이와 쩡이를 데리고 다른 교실로 들어가 스피킹 테스트를 진행해 주셨다. 다행히도 스피킹 테스트를 마치고 나온 쩡이의 얼굴은 아까보다는 한결 더 밝고 편해 보였다. 스피킹은 괜찮았다는 쩡이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쭌이 또한 엄마와 연습한 자기소개, 문장들은 다 답을 했노라고 의기양양해했다. 그렇게 또 한 번 아이들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결과가 바로 나온다며 대기석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우리의 심장은 또다시 널을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국제 학교 입학시험을 더 치다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잘 안 마시는 나의 간은 이미 피로와 스트레스로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띠링'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콩코디아에서 이메일이 왔다. 남편도 나도 각자의 이메일을 열었다.   

 

“Thank you for applying ……”    


축하가 아니라 땡큐로 시작하는 이메일의 서두가 어쩐지 쎄 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더라니…… 우리는 금발의 친절한 윙크를 날리던 그 교장선생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골프 이야기와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던 우리의 대화는 부질없는 허상이었을까. 단지 비싼 입학시험 응시료에 대한 립 서비스였을까. (그런 매너 따윈 개나 줘버려...라고 외치고 싶었다.) 우리는 말없이 아이들을 바라봤다.     


'얘들아, 너희는 죄가 없단다. 이 애미의 외국어 교육에 대한 개똥철학 탓이지..'    

    

남편 또한 말이 점점 없어졌다. 그 좁은 어깨가 한 뼘은 더 아래로 처져 보였다. 때마침, BIS의 결과가 바로 나왔다. Ms.Carol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미소는 콩코디아처럼 희망고문? 아니면 비즈니스용?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절대 저 미소에 속지 않겠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왕의 어명을 받기 위해 일어난 장군처럼 비장해졌다.    


"Congratulations, guys. You made it!"    


 Ms.Carol은... 아이들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으며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사실 그 짧은 찰나에 ' 국제 학교를 다시 검색해야 하나, 내일 가는 세인트폴에서도 떨어지면 어쩌지'하는 오만가지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하지만 합! 격! BIS는 이 영어 무지렁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준 구원자였다. 아! BIS! 만세 만세 만만세!!!    


우리는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학을 결정을 했다. 아니 그들이 합격을 번복하기 전에 얼른 확인 도장을 찍었다. 지칠 만큼 지치고 쪼그라들 만큼 쪼그라든 나의 심장은 100년은 먼저 달려 140살이 된 듯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입학시험 투어를 감당할 에너지는 없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가시고 한국인 선생님께서 입학에 필요한 서류나 준비해야 할 사항들, 셔틀버스, 확인사항을 다시 한번 안내를 해주셨다. BIS는 영국 교육체계를 따르며 다른 국제 학교보다 규율이 더 엄격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순둥 한 우리 새끼들을 좋게 봐주신 건가?     


조금 전만 해도 합격만 된다면 군말 없이 따르겠다고 믿지도 않는 신들에게 기도를 하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합격기준이 말이다. 한국인 선생님께 살포시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단순 영어실력만이 합격 조건은 아니라고 했다. 수업 체계를 포용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야말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 영어에 구멍이 많은 아이들의 합격소식에 환호하면서도 갸우뚱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나의 표정을 알아챈 걸까. 그녀는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쭌이와 쩡이의 삐뚤삐뚤한 글씨 그리고 여러 문장들의 옆에 V라고 체크가 된 종이였다. V 표시가 있는 문장들은 나와 함께 열심히 준비한 펀치 라인들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쭌이와 쩡이는 그렇게 열심히 엄마와 에세이를 준비했고 학교는 그 노력을 높이 샀다. 하긴 학교가 영어나 수학만 가르치는 곳도 아니지 않나. 흔들리던 나의 교육관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시험을 마치고 선생님은 간단히 학교 내부를 안내해 주었다. 당시에 수영장을 확장 공사 중에 있었기에 다 돌아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아이들은 곧 이 학교의 학생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한국인 선생님과 헤어지고 학교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그때 느꼈다. 맞잡은 남편의 손은 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이메일 한 통을 쓰기 시작했다.    

죄송한 맘을 정중히 그리고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 입학시험을 치기로 한 마지막 학교에 메일을 보냈다. 입학시험 참여가 어렵게 되었노라고 말이다. 또다시 입학시험을 치기에는 나의 심장이 버텨내지 못했다.


10년 같이 느껴지던 하루 일과를 끝내고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우린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냅다 달렸다. 대입 수험생의 순간을 10년이나 먼저 당겨 경험한 하루였다. 영어 까막눈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엄마와 함께 해준 우리 쭌이, 쩡이! 브라보!!

작가의 이전글 나의 영원한 내연남의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