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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Apr 21. 2022

피, 땀, 눈물의 하노이 탈출기

고난의 귀향길.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지난 일요일, 아이들과 나는 하노이로 돌아왔다. 6주간의 한국 여행을 마치고 말이다.

바야흐로 코로나로 온 하노이가 들썩대던 2022년 3월 5일 토요일.


하노이 라이프 30 개월, 한국 방문이라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귀향길이 망명길 버금가는 핵폭탄이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남편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3월부터 5월까지 장기 출장이 잡혔다. 그것도 부산으로 말이다. 남편이 출장을 가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그 소식을 들은 와이프는 단전에서부터 꼬장의 파도가 일렁임을 직감하고야 말았다. 특히 상반기에는 나름의 대소사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와이프의 탄신일은 물론 결혼 기념일, 쭌이, 쩡이의 생일이 있기 때문이다. 40년을 넘게 챙긴 와이프의 생일이야 캐시 입금과 꽃 한 다발로 퉁 치면 끝이다. 하지만 아이들 생일은 여전히 부모의 숙제다. 작년에도 2달의 장기 출장으로 홀로 생파를 준비했던 나다. 또다시 혼자 풍선을 불고 친구들을 초대하고 케이크를 준비하는 등 크고 작은 이벤트를 도맡아 할 생각에 억울해졌다. 올해만큼은 남편의 프리패스를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여 남편이 출국하기 정확히 사흘 전, 용단을 내리고야 만다. 남편과 같은 날,  출국하기로 말이다.


레츠 고 홈!


그렇게 우리는 비행기 발권 및 PCR TEST까지 부랴부랴 준비하기 시작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지. 준비하기 너무나 빠듯한 일정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역병이 창궐한 코시국이 아닌가.


“민뽕, 가는 길 억수로 힘들디. 인천에서  격리 버스 타고 다시 광명역, 다시 격리 칸 KTX 타고 부산역 가는 거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코로나로 하노이와 부산 사이 직항이 없어졌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결국 인천을 유해, 뿌뿌 뿌우~산으로 가기로 했다. 남편은 나의 결정을 묵묵히 따르면서도 엄근지 표정과 다부진 말투로 미리 경고를 해주었다. 작년 코로나를 뚫고 한국으로 출장 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부하들에게 말하듯 진지한 그였지만 우린 그저 2년 반만의 부산행에 신이 난 상태였다. 가족,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급하게 수배하기 시작했다. 종일 귀국 계획을 세우느라 피로가 1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PCR TEST라는 산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하긴, 4층의 일본인 친구 ㅇ은 출국 전날 한 테스트에서 양성이 나왔다. 무증상이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에게 같은 일이 일어난, 오! 노!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선물은커녕 어렵게 잡은 티켓까지 몽땅 날리는 것이다. 결국 병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영문으로 결과지를 뽑을 수 있는 병원 또한 한정되어 있어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떠날 쯔음, 하노이는 이미 2배 아니 3배 이상 빠르게 확진자가 급증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록적인 확진자 수를 보이며 코로나의 역사를 갈아 치고 있었다. 결국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는 평소보다 많은 검사가 몰리면서 출국 전까지 결과지를 받을 수 없을 가능성을 안내받고야 말았다. 그렇게 여러 병원을 문의한 끝에, 출국 당일 오전에 결과지가 집으로 발송되는 일본 계열의 병원 한 곳을 찾았다. 비행기 탑승은 자정에 가까운 심야 비행이니, 결과지는 당일 오후 5시 전까지가 데드라인이었다. 예약을 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코비드 검사로 콧구멍을 내주고서 귀국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내주리라.

‘재깍째깍째깍.’



PCR TEST가 나오는 시간은 10시경! 미리 전화로 알려주겠다는 병원 전화를 기다렸다. 전 날 잠을 설친 나는 6시부터 핸드폰과 벽시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눈밑의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오고 벽시계의 째깍거리는 바늘 소리는 스테레오 스피커를 통해 100배 확장되어 심장과 고막을 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10시 3분이 되자 걸려온 전화!


“もしもし。 あの、こちらは***病院でございます。昨日行なわれた テスト の結果ですけど、全員ネガチブ ですね。.”

“여보세요. 저, 여기는 ***병원입니다. 어제 실시된 테스트의 결과가 전원 음성입니다.”


할렐루야~ 음성이라는 결과를 듣고 ‘아리가또우’를 수백 번은 외친 것 같다.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전화를 붙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마치 몇 백억 대의 로또라당첨된 듯이 말이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한국에 갈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4시간  만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헙!’하는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너무 추웠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착 붙는다. 겨울이면 질색을 하는 추위 최약체인 나도 이번만큼은 반가웠다. 이제 부산으로 가는 열차만 타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게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공항의 수많은 검색대와 해외 입국자를 향한 서류심사라는 복병을 예상치 못했다. 비행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 줄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하던 남편의 경고성 멘트가 떠올랐다.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에 왔다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던 것도 잠시, 끝이 안 보이는 행렬에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이게 대체 무슨 줄이야?"

"여기 서는 거 맞아?"


누구 하나 줄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나는 일단 대중을 따르기로 하고 줄을 섰다.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줄을 선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앞에 선 20대 남녀는 서울말투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대고 있었다. 그래, 여기는 한국이다. 이럴 때는 일단 대세에 편승해야지. 역시 이 국룰은 통했고 말이다.


알고 보니, 해외 입국자들을 위한 서류 심사였다. 출발지와 상관없이 모든 입국자들을 무지막지하게 일렬로 세운 것이다. 그렇게 해외에서 받은 PCR TEST 결과지를 제출하는데만 1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체온 감지기를 거쳐 여러 가지 서류 작성과 심사를 위한 뺑뺑이를 돌아야만 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콜록대는 소리에 모공까지 쪼글아들고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두 겹 마스크를 코 끝까지 한껏 밀착시켰다. 이건 코로나도 코로나였지만 두 겹 마스크에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또한 칙칙 손세정 스프레이를 쉴 새 없이 분사해댔다. 손금이 지워져라 소독을 하고 온몸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다. 이 많은 인원들을 소몰이하듯 한 곳에 밀어 넣으니 오미크론의 확산을 부추기는 형국이었다. 공포와 긴장감에 없던 두통까지 생겼다.



*창구로 가십시오.



몇 번의 반복과 국내 체류 주소 확인, 그리고 인원수대로 따로 기입해야 하는 입국서류들의 압박이 일었다. 직원들 또한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초점 잃은 파리한 표정으로 구두점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대사를 반복하고 행동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선 데스크에서는 국내 보호자의 번호를 기입해야 했다. 전자 발찌라도 채울 심산일까.. 차라리 그 편이 더 간편했을 것이다. 국에 오면서 이토록 이방인 취급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장 힘 빠지는 대목은 세 번째 관문이었다. SF영화에 나올 법한 하얀 방호복을 착장 한 직원들은 눈동자만 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 연고지가 있는지 연락처는 어딘지를 적으라고 했다. 망설임 없이 남편의 번호를 적었다. 직원은 전화를 했다. 당연히 함께 입국하는 남편의 번호는 정지되어 있었다. 연락이 될 리가 없지. 통화가 불발될 시, 공항을 나갈 수 없다는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연이어 쓴 언니, 오빠의 연락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다고 헌법에 나옵니까. 통화음만 야속하게 울릴 뿐 대답 없는 너였다. 초조해졌다. 아이들 또한 조용해졌고 말이다. 이번에는 친정 엄마의 연락처를 남겼다.



"여보세요."

"여기는 인천공항입니다. 실례지만 '민'님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김치 없이 못 사는 뼛속까지 오리지널 한국인들 이건만.. 이건 뭐 고향에 돌아온 게 아니라 망명길에 오른 느낌이었다.


"어디 가세요?"

"부.. 부산요."


힘겹게 나와 기나긴 수색대를 빙글빙글 돌며 찾은 가방들을 끌며 게이트를 나섰다. 대학 입시 결과 발표보다도 더 가슴 저릿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하얀 방어복의 그들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이제는 진짜 퐈이널리~ 공항에서 벗어나는 거라 환호했건만 흰 방어복 직원 두 명이 다시 다가왔다. 행선지를 묻더니 부산이라고 하자 아이들과 나의 어깨에 빨강 스티커를 척척 붙인다. 이건 뭐 1등급 한우 도장받는 느낌... 그렇게 다시 부산으로 가는 격리 열차역을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린다.


이제는 누가 질문을 던지기만 해도 긴장하게 되었다. 또 뭔가 빠뜨린 건지, 체류할 주소 확인이 더 필요한 건 아닌지.. 백만 가지의 질문이 뇌를 헤집었다. ​해외 입국자들은 광명역으로 가는 격리 버스를 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입국 심사의 지연으로 당초 예정되어 있던 버스를 놓치고야 말았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겨우 다음 버스를 올라탈 수 있었다. 광명역으로 도착하자 으리으리한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 쩡이, 쭌이는 ‘우와~’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고 나 또한 추운 바람에도 그저 신나기만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찾아든 불운, 어째서 불행은 한 번에 오는 것일까.



역시나 우리들은 10분 차로 부산행 기차를 놓쳤다.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못 탄 나는 다시 1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하니, 속이 타들어갔다.




한국의 3월은 이리도 추웠던가. 신나서 방방 뛰던 쩡이도 점점 추위에 몸을 떨며 말이 없어졌다. 마른 다리를 덜덜 떨던 쩡이는 한층 더 힘들어 보였다. 이때 쭌이는 슬쩍 여동생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동무를 했다. 위기는 화합을 부르는 법이다. 그렇게 소시지 하나에도 젓가락 검으로 와호장룡을 찍는 신경전을 부리는 남매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점프를 하며 30-40분가량을 버텼다.


‘띠리리리리’ 드디어 부산역행 기차 안내가 나온다.


이건 뭐 로또 당첨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아니던가. 이가 덜덜 떨리는 꽃샘추위에서 벗어나 기차로 들어선 아이들은 금세 눈을 반짝거리며 기차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마다 사진을 찍었다. 이런 호떠이의 촌시리들 같으니라고... 꺅꺅 거리며 흥분하던 아이들은 3분 만에 레드 썬! 잠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온몸이 씹다 만 오징어처럼 흐믈흐믈 대기 시작했다. 눈을 잠시 감았다 떴더니 이미 부산역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산도 쌀쌀하긴 마찬가지 었다. 바쁘게 캐리어를 끌고 안내를 받으며 대기실로 들어섰다. 다시 격리자 전용 택시를 위한 대기가 시작된 것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 이미 택시 기사들은 퇴근길에 올랐다고 했다. 격리 택시는 요금이 높은 만큼 일반 택시보다 숫자도 적은대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30분쯤 지났을까. 택시 두 대가 멋진 커브를 돌며 왔다. 앗, 이런 멋진 택시를 보았나. 그리고 익숙한 하얀 방호복을 입은 택시 기사들이 우리들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겨우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믿기 힘든 일이 내가 하루 만에 겪은 일이다. 난민 표류기도 아닌 21세기의 귀국길이고 말이다.


비행시간 포함해 걸린 총시간만 해도 12시간 30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유럽을 갈걸...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격리 택시를 타고 힘이 풀릴 대로 풀려버린 나와는 달리 수다 삼매경의 쭌이, 쩡이는 여전히 깔깔거렸다.


‘짜장면, 치킨, 탕수육, 참치김밥...’


한국에서 먹고 싶었던 메뉴를 래퍼가 되어 빠르게 읊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급 허기가 졌다. 나도 모르게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배달음식 앱을 슬쩍 펼쳤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너도 나도 그간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더 크게 외쳤다.



그래, 그래도 한국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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