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1회  지리산 종주_1

05년 9월 10-11일

            9/11              03:45  중산리 매표소

                                 04:00  매표소 출발-

                                 04:40  칼바위 갈림길-

                                 05:15  망바위-

                                 05:45  로터리 산장(법계사) -휴식 10분   도상거리 3.4km(2시간)-

                                 06:50  개천문-

                                 07:20  천왕봉-아침식사, 행사 40분         도상거리 2.0km(1시간30분)-

                                 08:00  천왕봉 출발-

                                 08:25  제석봉-

                                 08:30  장터목 산장       -휴식  10분        도상거리 1.7km(30분)-

                                 09:00  연하봉- 삼신봉-

                                 09:50  촛대봉               -휴식  10분       도상거리 3.0km(1시간 30분)-

                                 10:10  세석평전 -

                                 10:30  영신봉-

                                 11:05  칠선봉-덕평봉-

                                 12:50  벽소령               -휴식  10분       도상거리 6.7km(3시간)-

                                 13:00  벽소령 출발- 

                                 14:00  점심 (10분)-

                                 15:00  삼정리(음정)                             도상거리 6.7km(2시간)  

                                                     총 도상거리        23.5 km (11시간) 


9월10일_토_19:00 

 백두대간의 첫걸음을 위해 금주하며 각오를 다지는 한 주를 보내고, 물푸레의 격려를 받으며 집을 나선다. 토요회 사랑 겸 주말 산행을 마친 26산케들의 모임 장소인 이어도에 도착하니, 아아 가을 전어의 구수한 냄새에 어찌 맥주 한 잔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케 동료들의 격려에 부끄러워지는 마음으로 대간 출발의 발걸음이 왠지 의무감으로 젖어온다. 십 년 동안의 꾸준함을 자랑하는 우리 26산케의 명예를 걸고 십오 개월의 장정을 부디 잘 견뎌내야 할 텐데 말이다.

 당분간 한 달에 두 번은 산케들과의 주말 산행 대신에 격주 토요 무박산행을 나서야 하므로 가장 염려되는 것은 건강이다. 사실 개별적인 교통수단과 시간을 할애하면 일박 이일 정도의 여유로운 산행 계획이 가능하나, 여러 가지 교통편의를 생각할 때, 산악회 단체 버스를 이용함이 경제적이기에 어쩔 수 없이 힘들지만 타이트한 스케줄에 이끌리게 되었다. 아무튼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고, 소문에 법적으로 대간길을 막겠다는 환경론자들이 떠들고 있다 하니, 노파심에서 지난여름 마지막 즈음에 속초 바닷가를 거닐며 물푸레를 꼬시다가 결국 홀로 나서게 되었다.

 아무튼 이 회장을 비롯한 여러 산케들의 뜨거운 격려에 감사드리며, 부디 무탈 산행의 작은 바람과, 또 한 번 내 삶의 보람으로 십오 개월을 살아간다면 남은 생애의 첫날들이 늘 즐거우리라. 비록 낯선 여러 산악회 멤버들과 동승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대부분의 일정들을 함께 하면서 각 팀들의 또 따른 대간 산행의 목표와 기록들을 존중해가며, 좋은 동행길이 만들어지리라.


비록 산케들과 동행치 못하지만, 이번 대간 종주 기간 내내 홀연히 어느 능선길에 바람처럼 나타나서 내 영혼을 일깨우고 이 땅의 역사에 증인으로 나서 줄 K노인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하니, 결코 홀로 걷는 외로운 산행이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부디 영원한 생명으로 건강을 유지하시기를... 첫날, 산행을 떠나며 인사드리고자 합니다.



9월11일_일_04:00

 대간 첫날의 깊은 새벽은 산중 특유의 날씨 변덕 마냥 안개구름이 제법 빗방울처럼 얼굴을 적시며, 여름의 끝자락에 느끼는 더위를 촉촉하게 식혀준다. 전날 설렘과 비좁은 이동 버스 좌석에서 꼬박 새운 파리한 얼굴들을 프랑스제 성능 좋은 헤드랜턴 불빛으로 가리며 안개길을 더듬어 중산리 계곡을 오르기 시작한다. 사방 천지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지리산의 포근함을 느끼며 그렇게 많은 산꾼들은 더 깊이, 더 높이 빠져들고 있었다.

 백두대간을 꿈꾸면서 지리산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어 보았으나, 역시 전후 격랑 속에서, 50년을 살아온 나에게 자연의 순수함이라던지, 더 멀리 떨어진 역사 속의 아름답고 해학적인 이야기들은 곤두박질쳐 사라지고, 뇌리에 새겨진 단어들은 빨치산, 공비토벌, 이헌상, 산 손님... 이제 그 생채기의 아물음에 속절없는 긴 시간을 보내며 아픈 발걸음과 함께 이 땅을 밟아 나아가는 우리 세대의 끝날에는 이 지리산의 기억이 赤拘山(적구산)이 아니라  頭流(두유),  方丈山(방장산)으로 살아나리라. 

 아직은 미물들은 물론 중생들 마저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에, 얼마 후의 여명을 기대하며 천천히, 그러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산 손님 아닌 산님들은 분명 깨어있는 영혼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무한의 自由人(자연인) 이리라.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인간이 만든 어떤 굴레도 그들을 엮을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자연을 움직이며 인간에게 다스림의 형태로 다가서는 神(신)의 굴레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사십여 분간의 워밍업으로 칼바위 갈림길에 도착하니, 땀으로 젖어드는 긴소매 옷을 벗고 얇은 티 셔츠 바람으로 직벽 된오름을 채비하고. 이후 한 시간 여의 무념무상 오름길의 사투를 벌이며 땀과 안개비에 젖어드는 나른함을 즐긴다. 지난날 젊은 이데올로기의 영혼들이 다니던 밤길은, 이 땅의 아픔을 함께 하려는 오늘의 산꾼들이 밝히는 작은 불빛으로 줄을 이루어 로터리 산장을 지나 법계사 입구 계단 밑에까지 이어진다. 


9월11일_일_07:20 

 간간히 뿌리는 가랑비 속에서 법계사를 지나 능선 위 기다란 암반에서 밝아오는 대원사 계곡을 내려다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며 헤드렌턴 모자를 벗고 시원함을 느낀 후, 마지막 천왕봉 정상을 향한 급경사 된오름을 맛본 지 한 시간 여 만에 개선문(개천문)을 지나 정상에 올라서니 제법 서늘한 바람에 추위를 느낀다. 긴팔 옷을 꺼내 입고 약간 허기지는 뱃속을 채우며 후미조를 기다린다.

 지난해 여름, 백무동에서 올라와 중산리로 하산할 시간에는 맑은 날씨였으나, 대낮이라 삼 대 덕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천왕일출(지리10경)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오늘은 첫 출정의 기념일을 핑계 삼아 안개가 걷히길 기대해 보지만, 삼십여분이 지나도 변덕을 부리질 않는다. 음산한 안개비가 사위를 맴돌고, 칠선폭포(지리10경)를 내려다보는 북사면 바위너럭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때운다. 

 선두조와 후미조의 정상 도착 시간차가 사십여분이 나서 점점 몸이 식어가니, 남은 길이 염려되어 앞길을 약간 서둘러 느린 행보로 장터목까지 가기로 하고 먼저 출발한다. 통천문을 지나니 벌써 세석에서 출발한 역코스의 젊은이들이 천왕봉을 향해 힘찬 걸음으로 스쳐간다.

 항상 느끼는 싱싱함과 곧아 보이는 심성들. 이 땅의 젊은 청년들이 저리도 순수한데, 누가 그들을 탓하며 세대를 논하고, 다음을 걱정하랴. 이쁜 내 아들, 딸들... 그네들은 기억 속에 아름다운 강산만을 간직하고 부디 선녀 계곡의 너울거리는 휘장 속에서 포근한 삶을 누리라.

9월11일_일_08:30

 여덟 시에 정상에서 출발하여 약 삼십여 분간 장터목 산장까지 홀로 느린 행보로 걸어 내려오는 중에 제석봉 고사목 지대에서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며 삼 일째 주위를 맴돈다는 동년배의 사진작가를 만나 잠시 환담하며 걸음을 멈춘다. 아직 인터넷, 디지털카메라 작업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고집으로 필름 카메라를 세, 네 개씩 꺼내며, 몇 날이고 기다려야 하는 생활이 한라산과 지리산만 삼십 년. 지리산의 아름다움은 맑은 날씨가 아니라 이렇게 깜깜한 안개가 잠시만에 걷히는 짧은 순간에 산허리에 걸리는 맑고 짙은 구름 띠가 제격이니, 어쩌면 우리의 삶도 적당한 고통의 시간들이 추억의 한허리를 장식해야 남겨 놓을 역사라 이를 것인가. 

도벌꾼이 저질렀다는 벌목 방화가 남겨 놓은 고사목의 정취가, 되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이 산자락의 정상둘레를 어울리는 장식처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불태우려 한 것은 벌목의 흔적만이었을까, 아니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 땅의 설움의 흔적을 깊은 이곳 산중에서 지우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저 천왕봉이 내려다보는 이 제석단에서 훨훨 타오르는 불꽃을 지피며 큰 祭(제)라도 올리고 싶었는지도.

 장터목 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생리 문제를 해결하고 나오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고교 일 년 선배를 다른 일행 속에서 발견하니 참 반갑다. 평소에도 산을 즐긴다고 들었지만, 앞니 쪽에 심한 공사를 한 것으로 보아 아직도 릿지를 즐기는가 보다. 바쁜 일정으로 서로의 갈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9월11일_일_10:00

 장터목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평탄한 지리 주능을 맛보며 홀로 걷는 오솔길에는 정적마저 감돈다. 연하봉 오름길에서 만난 하늘이, 청운이 어린 형제들과 십여 분간 동행을 즐긴다. 50년대 김해 읍내 어느 오막사리에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멀리 남해에서 교편을 잡으며 가끔씩 들리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저 또래의 착한 아이는 간밤에 오줌으로 이불을 적신 죄로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다니면서 생애 첫 부끄러움을 배우고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삼신봉, 촛대봉 오름길까지는 인적도 드물 만큼 조용한 지리 능선의 별미다. 세석으로 이어지는 한 시간여의 이 짧은 구간은 긴 행보 속에서 휴식과 컨디션을 조절하기에 제격이다.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흰색, 보라색 들국화 만이 외로운 산행객을 반기고, 화려 하다기보다는 청아한 자태의 매발톱(며느리발톱) 청보라 꽃잎이 삭막한 능선길을 밝힌다.

내가 K노인을 만난 것은, 서울 근교 도봉 자락에서 한가로이 흥얼거리는 팔십 노인으로 두세 번 스친 후, 우즈벡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면, 이건 우연치고는 참 흥미로운 일이다. 금년 초, 우즈벡에서 이만여 평 농지를 임대받아 선진 농업 기반을 구축한다는 가나안 농군학교 임원진들 속에서 건강하긴 하나 연세가 만만치 않은 노인이 주축이 되어 뭔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느껴지니 자연히 관심이 기울여지고, 이후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는 예감 같은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석철쭉(지리10경)으로 화려한 봄을 지냈을 평전을 지나는 발검음에 간간히 뿌려지는 가랑비가 시원스레 느껴진다. 늦여름을 장식하는 습원의 축축함이 풍성한 평원을 적시고 있는 가운데, 초지를 장식하는 갖가지 들꽃들과 짧은 갈잎의 어울림들이 산죽 능선을 잘 꾸미며 펼쳐진다.

9월11일_일_11:00

 영신봉을 지나 긴 계단길을 내려오니 칠선봉으로 넘어가는 산죽 대밭이 길고 어둡게 펼쳐진다. 보라색 매발톱 야생화가 참 곱다고 여겨질 고개에서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과, 야광나무 숲이 아름다운 칠선봉을 잠시 가리다가 보여준다. 한 시간 여만에 칠선봉에 도달하니, 제법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며 허기를 느낀다. 남은 바나나 한 개를 먹고 물로 배를 채우니 위가 편안한다.

 영등포 쪽에서 함께 온 일행 두 분은 개구쟁이 시절로 돌아가 소년 같은 어감으로 장난치며 티격태격 재미를 만든다. 잠시 산케들이 그리워진다. 이 전임의 넉넉한 배낭 속도 그립고, 김 대장의 컵 딸린 시원소주, 이 회장의 토속 젓갈도 그립다. 점심시간이 다다오는 모양이다. 삼 년 전 건강의 적신호를 경고받고 매우 조심스레 지켜온 건강을, 지난 일 년 반 동안 산케들의 정을 느끼며 열심히 따라붙은 산행이 오늘 이렇게 용기 내어 긴 여행을 저지를 수 있게 해 주어 참 고맙다. 언젠가 같은 여유를 말들 수 있길 바라며 한걸음 걸음마다 함께하는 벗들을 떠올린다.

9월11일_일_12:00 

 벽소령까지의 긴 트레킹 속에서 덕평봉을 지날 때까지 이젠 여유로운 발길로 속도를 늦춘다. 빠른 걸음이면 한 시간 여만에 도달할 벽소령 1차 목표지점이 아쉬운 듯이 점점 앞질러 가는 일행들에 길을 내주며, 운해 속에 펼쳐지는 지리 남녘, 대성골 선유동 계곡을 간간히 즐기려 하나, 짧은 햇살 기운에 고개를 들라치면 후두둑 거리는 빗방울로 칠선봉 선비샘에선 비옷을 꺼내다 말기도 한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K노인과 우즈벡의 타슈겐트 호텔에서 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곳 경제 사정상 하나뿐인 골프장을 경영하는 내 친구 일행과 농장 사업을 위해 방문한 가나안 팀들이 묵을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별 바쁜 일 없이 방문한 나의 궁금함을 풀 수 있는 저녁 시간이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자네는 神(신)을 믿어 본 적이 있는가?"
첫 질문이 벌써 심상치 않다고 여겨지지만, 아무튼 교회 재단과 함께 온 일행이니 있음 직한 질문으로 여겨지긴 했으나, 대답이 그리 쉽질 않다. 
보통 그러한 종교적인 질문에는 빠져나갈 궁리를 해가며 대답을 하던 버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노인의 뭔가 숨겨진 듯한, 아니 있음 직한 흥미로운 과거가 궁금하여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대답을 적당히 하고 싶진 않았다.


9월11일_일_12:50

 산행 초보자의 실력으로 일행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휴식을 줄여가면서 내 페이스를 유지한 결과, 오늘의 첫 구간 목적지인 벽소령 대피소에 무사히 도착하여 간식을 즐긴다. 이제 첫 고비를 넘긴 일행들이 미소 짓는 여유를 보이며 눈인사를 나눈다. 앞으로 더욱 친해질 예감과 서로 도와가며 나아갈 먼 길에서 꼭 필요한 인사들을 아직은 수줍게 작은 먹거리 한 점 가만히 건네며 대신한다.

 아무튼 26산케들의 실력도 결코 만만치 않음을 새삼 느끼며, 자유인 산악회 리더들께 감사를 느끼고, 앞으로 계속 신세를 져야 하니 만큼 잘 따르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아홉 시간을 걸어본 게 작년 설악 무박 이후로 처음이다. 그런대로 체력은 유지되었다고 느껴진다. 다만 등산화를 좀 더 무겁고 두꺼운 것으로 바꿔야겠다. 조금씩 발바닥이 따가워 옴을 느끼니, 삼십 년 전 행군 시 평발의 서러움이 다시 새삼스레 떠오른다.

 39사 창원 훈련소에 머리 깎고 입소한 다음날, 신체검사에서 선배 군의관이 귀향조치를 권한다. "형님, 법무부 밥 먹다가 삼일 만에 국방부 밥 얻어먹으러 왔으니 제발." 억지로 사정해서 남은 군대 생활이 그렇게 즐거웠는데, 그놈의 행군만 아니라면...

9월11일_일_15:00

 벽소명월(지리10경)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벗들과 얼큰한 산장에서의 하룻밤을 훗날로 기약하며, 하산길로 나선다. 십여분 너덜바위 지대를 급히 내려오니, 임도 인지, 군사용 도로인지, 아무튼 지겨운 하산길이 6.7km. 두 시간 동안의 삼정리 하산길은 참 길었다. 다음 2차 산행에도 어김없이 걸어야 할 이 길.

 광대골 큰 계곡을 그렇게 터벅거리며 따가워 오는 발바닥을 살금살금 디뎌 음정리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새콤한 깍두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9/12  배 기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