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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2회  지리산 종주_2

05년 9월 24-25일

            9/25     03:45 성삼재-04:15 코재(화엄사계곡)                                            3.0km

                        04:30 노고단-(10분휴식)-04:40노고단출발                                   10.5km 

                        05:00 돼지령-05:30 임걸령(피아골)-(10분휴식)-05:40임걸령출발

                        06:10 노루목-06:35 반야봉-(15분휴식)-06:50 반야봉출발

                        07:20 삼도봉(날나리봉)-(40분간 아침식사,휴식)-08:00삼도봉출발

                        08:10 화개재(뱀사골)-08:40토끼봉(화개면)-09:40 명선봉

                        09:50 연하천산장-(10분휴식)-10:00연하천산장출발                        3.6km

                        10:10 음정갈림길-10:20 삼각봉-10:40형제봉-

                        11:30 벽소령-(20분휴식)-11:50 벽소령출발                                    6.7km 

                        14:00 삼정리(음정) 도착                                                     

                                                                                                 총 10:15      23.8km 

반야들국화

9월 24일_토_22:00 

 토요 휴무의 사무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무박산행의 밤길을 준비하며, 26산케의 북한산 등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김대장과 통화를 나눈다. 무리하지 않도록 염려하는 고마운 마음과 내일 오랜만에 청보화님과 함께 가을맞이 산행길에 나선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건축과 졸업 작품을 시월 중순까지 마무리해야 한다며 추석 때 큰집 차례에도 참석치 못하고 학교 부근 지하 셋방을 얻어 작업실로 꾸며 놓고, 바짝 마른 얼굴로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밤샘을 즐기는(?) 작은놈에게, 디카 촬영법을 배우기 위해 토요일 오후 동안 핸드폰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다. 야간 등반을 위한 저녁 식사 무렵에야 바삐 나타난 얼굴은 늘 만족이다. 잠실에서 치른 올해 연고전은 연대가 4:1로 압승을 거두었다고.

 바쁜 와중에도 마지막 학창 시절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싱싱한 젊음들이 부럽고 안심이 된다. 학창 시절의 기억이라면, 명륜동 뒷골목 어두운 튀김집 구석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취한 얼굴로 잠겨진 교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나의 젊음이 이젠 이 세대에서 먼 이야기로 끝이 나야 한다. 부디 건강한 몸으로 내년 봄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하고 싶은 일하며 맘껏 누릴 앞날의 자유를 위하여 마지막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길 기대해 본다.

 일 년 반 동안의 대간길을 비록 몸은 함께 하질 못해도 맘으로 함께 하겠다는 물푸레의 정성을 타고 출발지인 신도림역에 도착하여 이 주 전 처음 대간길을 나섰던 몇몇 젊음들과 반가움을 나눈다.

 "이 주가 꽤 길게 느껴집니다.."

 산꾼들의 수줍은 정 나누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남은 대간 길은 짧아지고,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지고, 자유인을 꿈꾸는 대간 멤버들의 뿌듯한 보람이 점점 커져 나가 진부령 넘어 향로봉, 백두산까지 넘쳐나리라.

반야에서본 노고운해

9월25일_일_03:30

 첫 회 보다 조금 줄어든 대간 멤버들을 실은 버스는 막힘없는 고속도로를 달려, 덕유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남원 인월면을 거쳐 맑은 밤하늘 별이 쏟아지는 성삼재 주차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초가을의 서늘함을 올해 처음 이곳 대간 마루금에서 느끼며 배낭에서 긴팔 옷을 꺼내 입는다. 어둠 속에서 노고단 쪽 매표소가 비교적 밝게 자리를 잡고, 다음 구간인 만복대 오름길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달빛 아래 검게 잠들어 있다. 준비운동을 겸한 체조와 생리문제를 해결하고 비교적 한가한 야간 등반객들 틈에 끼어 매표소를 통과한다.

 말로만 듣던 성삼재-노고단 길은 어둠 속에서도 헤드랜턴이 필요 없이, 추석 보름 갓 지난 하현달 아래 잘 정비된 부잣집 앞마당 길 걷듯이 여유로운 발걸음이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대간 길인가, 시민공원 오름길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하게 정비한 국립공원 정책자들께 마구잡이 장사를 맡기고 싶다. 이러니 구례-남원 간 산업도로 놔두고, 대간 정맥 마루금을 통과하는 신작로 건설에 반대하는 환경론자들의 반감을 살 수밖에. '토지'의 최참판댁을 재현한답시고 섬진강 어귀에 지은 大家(대가)를 보고 박경리 님이 "지리산에 미안하구나"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오늘 백두대간 한답시고 세 내 시간을 화엄사 계곡이나, 달궁계곡을 올라와야 할 성삼재 고개터에서 버스에 실려 와 편히 대간 첫걸음을 옮기니 그야말로 지리산에 미안하다.

 코재를 휘감아 오르는 고개턱에서 빠른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오른쪽 구례의 빛나는 야경을 감상하니, 모처럼 쾌청한 가을 새벽의 화엄사 계곡에서 화려한 무당들의 펄럭이는 영혼이 밀려 올라온다. 노고단 지리 제3봉까지 밀어닥치는 영혼들의 춤사위에 묻어오는 쇠붙이 내음, 화약 냄새, 농약 냄새...

"神(신)이 인간과 자연을 만들었다면 참 큰 실수를 한 게지. 인간이란 게 자연을 망치다가 더불어 신을 만들고 죽이고, 제 맘대로 할 거니까."
우즈벡 공항으로 떠나던 날 아침 K노인의 독백 같은 마지막 마무리 말귀가 오늘따라 머리를 맴돈다.
"어르신, 저도 한때는 잠시 동안이지만 교회 다닌 적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적인 친근감을 보이며, 애써 다가가는 자세로 첫날 저녁의 화두를 이끌어 내는데 쉽게 성공했다.
사실 생긴 외모나 느낌이 그런 종교적인 엄숙이나, 진지함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내게, 어쩌면 노인으로서는 별 부담 없이 술 한잔 나누며 시간 때울 상대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순간, 나 자신이 십 수년 전 국가적인 행사인 88 올림픽을 계기로 우연한 기회를 잡아,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자영업의 대열에 뛰어들어 돈 한 푼 없는 사장 행세를 하기 시작했을 즈음에 잠시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자신 있게 대답은 했으나, 내가 기억하는 건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즈음 뭔가에 좇기던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 가위에 눌리는 고통을 받으며, 교회 현관 마룻바닥 끝에서 살려만 주시면 교회 열심히 다니겠다는 약속을 하고 깨어난 꿈이 하도 뒤숭숭하여 이삼 개월 집 앞 교회에 등록을 하고 다닌 적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외국에 나다니던 본 목사의 헌금 설교에 식상하여 이후론 완전히 잊고 지낸 이력이다.

 노고단 산장으로 오르는 오백여 미터 깔딱 오름길이 오늘 처음 밟아 보는 산길다운 산길이다. 밝은 달빛과 헤드랜턴으로 발아래는 밝아 보이나, 유난히 울퉁불퉁한 바위 너덜을 처음 대하니 갑자기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늘진 작은 돌부리에 발목을 매우 조심스레 밟아 오른다. 앞으로 긴 여정 속에서 부디 긴장감을 유지하며 작은 실수로 인하여 대간길을 멈추는 불상사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반야에서본 천왕일출

9월25일_일_04:30

노고단 산장에서 외투를 벗고 잠시 얼굴을 씻은 후 바로 오 분여 만에 노고단 고개에 이르니 제법 땀으로 젖은 얼굴에 냉랭한 가을 새벽이 다가온다. 자연훼손을 염려하여 막아놓은 노고단 정상을 바라보니 부드러운 봉우리가 검게 밤하늘에 솟아 있다. 오른쪽 사면에 크게 자릴 잡고 웅장하게 들어선 방송 송신탑 건물이 화려한 조명시설을 아낀 채 조용한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老姑壇(노고단), 박혁거세의 어미 전설이 아니라도, 황량하고 쓸쓸한 지리 제 삼봉의 광활한 평원에서 수많은 사건들을 간직한 채 조용한 새벽을 맞는 역사의 운동장에는, 일제강점기의 선교사 수양관 잔해도, 여순사건의 어지러운 토론도, 주위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종석대, 만복대, 문수대도 말없이 어둠 속에 갇힌 재 다가올 새벽을 겸허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정상을 본뜬 고갯마루 돌탑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후 서둘러 노고단 북사면을 따라 천왕봉 백 리 길을 밟아 오르내리는 일렬 주능 행렬을 펼친다. 어둠 속의 주능선 길은 전날 내렸음직한 비로 젖은 진흙과 간간이 이어지는 제법 큰 너덜로 인해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조심스레 밟아 구례 야경을 끝으로 억새 평원이 아름답다는 돼지령을 지나 한 시간여 만에 임걸령 샘물 앞에 이른다.

 평원의 아름다움도, 피아골의 숱한 폭포와 沼(소)를 외면한 채 이리 이천리 지루한 발걸음을 계속하는 산꾼들의 대간 탐사에는 무슨 사연들을 담고 있을까. 이 땅의 지붕들을 밟아 나가며 기슭마다 묻어 있는 이 땅의 슬픈 영혼들을 산등성이 고갯마루로 불러 올려 함께 춤추고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발걸음이 되어도 좋으련만.

 왕시루봉 능선과 피아골을 오르는 남쪽 길과 임걸령이 만나는 이곳에는 유난히 전설이 많다. 林桀年(임걸령)이라는 화적 두목 이야기며, 피아골 황호랑이 이야기, 화엄사 어귀 황총각 이야기들도 이곳 임걸령 길목에서 북쪽 심단골 사람들과의 하룻밤 만남 속에서 나누던 무수한 지어냄 중 하나 이리라.

반야봉에서

9월25일_일_06:00

 임걸령을 출발하여 삼십여분 만에 노루목에 다다라, 예정 시간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행군하고 있음에 스스로 놀랍다. 지도상의 시간이 많이 차이가 난다. 당연히 반야봉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앞쪽 선두조를 따라붙는다. 조금씩 밝아오는 여명에 랜턴을 벗고 반창 모자를 바꿔 쓰니 매우 시원하다. 어제 출발 전 염려스럽던 왼쪽 허벅지 인대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안심이다. 또한 옛날 가죽 등산화를 창갈이하여 시험해보니 다소 무겁긴 해도 요즘의 가벼운 등산화보다 장거리 트래킹에는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지리 주능에서 벗어난 삼십여분의 반야봉 오름길에서 정상 조금 못 미친 안부에서 맞이하는 천왕일출에 모두들 카메라를 꺼내 들고 환상적인 해오름이 연출하는 지리 동부의 맑은 장관을 담기에 바쁘다. 어제 작은놈에게 배운 솜씨로 후레쉬를 쓰지 않고 바위에 기대어 조리개 노출을 길게 가져가 본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구도를 잡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함께하지 못한 산케들께 서툰 솜씨라도 내가 직접 담은 싱싱한 대간의 정경들을 보여주고 싶다. 이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나도 제법 사진 솜씨가 붙으려나, 아무튼 디지털카메라가 쉽고 편리하다.

 지리 제2봉 반야봉, 불교적인 해석이 아니래도 범인이 이 광활한 대자연의 정상에 우뚝 오르면 智慧(지혜) 로움이 솟아나 비움(空)을 깨달을 것이니, 가히 지리 주능의 한가운데에 솟아 자랑할만하다. 비록 반야낙조(지리10경)를 기다릴 순 없으나 지난번 오름에서 보지 못한 천왕일출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으니, 삼 대 덕은 못 쌓아도 이 대 덕은 쌓은 것일까. 북으로 중봉을 거쳐 하산하는 달궁계곡 길은 휴식년으로 막혀 있고, 뱀사골 웅장한 고요를 간직하고 남으로 향한다. 불무 장릉을 거느린 반야봉의 서쪽 낙조 자리의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펼치는 노고해운(지리10경)의 진수를 맛보며 또 한 번 카메라를 꺼내 든다.

삼도봉

9월25일_일_07:20

노루묵에서 삼십여분 헐떡이며 올랐던 반야봉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오자니 급경사 길이 얄밉다. 다행히 십여분 만에 왼쪽으로 삼도봉을 향하는 삼각길을 만나니 배낭을 메고 올라와야 했던 보람이 있어 다행이고, 다소 경사는 심하나 삼도봉 어귀 주릉선 길에 바로 닿을 수 있었다.

 교묘한 道界(도계)에 위치하여 낫날봉, 날라리봉이라는 아름답고 친근한 이름을 잃고 三道峰(삼도봉)이라 불리는 이곳 넓은 바위너럭 위에는 전남, 전북, 경남의 이름으로 오묘한 메시지를 담은 청동 표지비가 하늘로 향하고 있다. 유난히 지역적 갈음에 익숙하여 현대사를 슬프게 물들인 우리 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이 하나의 산봉우리에서...

 생각보다 새벽길 산행객이 붐비지 않고, 빠른 걸음들로 예정된 시간보다 여유가 있어, 이곳 넓은 바위 위에서 아침 식사와 긴 휴식을 취한다. 지난번 하산길에서 아픈 발걸음을 달래주던 토속주가 생각나 집에서 담근 포도주 한 병을 배낭에 넣고 왔는데, 때아닌 山頂(산정) 라면 끓임에 홀려 아침 해장술로 변하고 말았다. 포도주와 라면, 지친 땀 흘림 뒤에 어우러지는 웰빙에는 이론이 없다. 충분한 휴식 후 남은 먼길을 위해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니, 명창 김연순 님의 '금강산 타령'이 지리산 정기와 함께 아침을 맑게 하며 울려 퍼진다.

화개재

9월25일_일_08:00

 아침식사 후 화개재로 떨어지는 긴 계단길(육백계단)은 무릎 보호대를 꺼내게 만든다. 앞으로의 긴 여정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오면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미리 조치를 하고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많이 내려가면 갈수록 같은 높이를 오르내려야 하는 대간길, 내리막이 싫은 길.

 식사 후 밝은 시간 탓인지 선두조는 재빨리 나아가고 약간 뒤처지니 오직 홀로 뿐인 산길에 적막마저 감돈다. 십여분의 급경사 내림길 끝에 펼쳐진 花開(화개)재에는 풀잎만 무성하고, 북쪽 뱀사골 대피소로 향하는 길목이 경사가 급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토끼봉으로 올라온 남쪽 연동골의 화개 사람들과 시장을 이루었다니, 화개장터의 시작 인가.

 토끼봉을 지나 연하천 산장이 있는 명선봉 오름길은 두 시간 남짓 지루한 오름길이다. 앞뒤에 일행이 보이지 않으며 천천히 즐기는 산행을 맛보며 호흡을 가다듬으니 편하다.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김민기, 양희은-봉우리)

흥얼거리는 노랫말이 오늘따라 조용히 다가오며 내 남은 삶에 제법 의미 있는 느낌을 보탠다.

연하천산장 단풍

9월25일_일_10:00

 생각보다 제법 뒤처진 걸음으로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 산장에 도착한다. 다소 낡은 듯한 외관이지만, 넓은 앞마당이 반기어 준다. 무엇보다 철철 넘쳐흐르는 식수가 마음에 든다. 빈 물병을 채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반겨주는 총대장과 산장을 배경으로 한 컷 기념사진을 남긴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예닐곱 차례 대간을 행하고, 전국 정맥을 밟아 내리는 자유인의 깊은 뜻을 어찌 알리요마는, 이제 초보 산행객으로 작은 꿈을 이루고자 따라붙는 발길에 이리 여유 있는 행보를 만들어 주는 대간 집행부들의 노고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하고 싶다. 

 십여분의 휴식 후 산장을 나서는 입구에 이른 단풍이 벌써 붉게 단장을 마쳤다. 산꾼들이 미쳐 따르는 이 땅의 사계절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할 시월이 다가온 것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구상나무 숲과 주목 군락지의 초록 배경에 어울릴 지리 단풍놀이는 언제쯤 이루어 질까,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함께하고 싶은 이도 많은데.

 오늘의 종주 목표지인 벽소령까지 3.6km, 길어도 두 시간여의 발길이 아쉬울 정도로 여유롭다.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양쪽 길섶에서 이름 모를 풀꽃들을 담아본다.

삼각봉

9월25일_일_10:20

 연하천 산장을 지나 잠시 후 만난 음정길 갈림에서 잠시 망설여진다. 지난 회에 힘들었던 벽소령에서의 비포장 도로가 생각나, 이곳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탈출하느냐 고민한다. 그러나 훗날, 백두대간 이천리 길에 십리길 빼먹은 찝찝함을 없애기 위해 오름길에 올라서니 기울어진 고목을 배경으로 지리 남녘의 운무가 펼쳐진다. 지리仙境(선경)은 도처에 눈길을 머물게 하고 긴 종주길에 피로를 잊게 한다.

 지척에 보이는 형제봉의 암릉이 아름답게 다가오며, 지리산의 유혹에 빠진 형제는 아니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머물고 싶도록 능선길이 아기자기하다. 지리 능선 대부분의 낮은 조릿대와 철쭉 오솔길이 아닌, 지그재그의 암문들이 이어지는 절경을 만끽한다. 이곳을 놓치고 지리 능선 종주를 얘기하면 평생 두고 바보스러울 아니었겠나. 암문 바위틈을 지날 때마다 북쪽 광대골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냉장고를 열어 놓은 느낌이다.  

 살아가면서 숱하게 스치는 아름다움들과 슬픈 것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쪽일까. 삶의 여정 속에 묻어 지내는 무수한 사건들이,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많은 아름다움 들을 스쳐 지나게 만들겠지. 오늘 내 눈에 비치는 이 아름다움은 내 삶의 끝자락에 찾아온 행운일까, 멀리 느껴지던 형제봉의 높이 솟은 바위 아래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형제봉 아래 큰바위

9월25일_일_11:30

 형제봉에서 벽소령으로 향하는 북사면 길은 다소 어두운 너덜길에 오르내림이 이어지는 까다로운 길이다. 구간 종주의 마지막 단계에서 두어 번의 줄잡이를 요하고 힘 빠진 발길에 주의를 요할 만큼 모처럼의 암릉길이다. 이번 산행길에서 처음 시도한 양팔 보조 지방이가 매우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지난번 중산리 구간보다는 시작 구간에서 다소 힘들지 않은 관계로 체력에 여유를 느낀다. 단지 삼정리까지 긴 시간의 하산길이 남아 있음에 아직도 걱정이 남아 있긴 하다.

"됐어. 됐어... 난... 장사꾼이야..."
은퇴한 목사님 정도로 여겨지던 모습에서 어느 정도 별다른 느낌을 간직하긴 했어도, 짐작이 영 비껴 나가니 당황스럽다. 그곳 우즈벡에서 농사일을 벌리겠다는 교회 단체들의 의도야 대충 짐작도 가고 그리 당황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백발의 노인이 대체 무슨 장사를 벌리겠다는 것인지...
"자네 며칠 여기 있을 동안 같이 술친구 할 수 있겠어?..."
나는 그렇게 서남아 여행의 며칠 밤을 엉뚱한 소설 같은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다.

 연하천 산장에서 벽소령에 이르는 한 시간 반 동안은 시간을 잊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그렇게 외롭지 않은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지나온 삶들을 반추해가며 결코 후회스럽지 않은 과거들을 스크랩할 수 있도록 붙잡아둔 모든 주위에 감사함을 느낀다.

 산장에 도착하니 오늘 종주의 완성을 자축하는 이슬이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이 기쁜 순간을 위해 무거운 술병들을 짊어지고 걸어온 정성이 아름답다. 남은 간식을 펼쳐 놓고 잠시 발을 식힌 후 긴 하산길에 나선다.

벽소령-음정길

9월25일_일_14:00

 지난번과는 달리 다소 안정된 발걸음이긴 하나, 두 시간 여의 비포장 하산길은 역시 지겹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굽이를 수차례 돌아 들며 간간히 삼각봉 영원령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을 담아 본다. 이렇게 수많은 계곡이 광대골로 모여들어 삼정리에 이르면 큰 소리로 흘러내린다. 

 대간길이 아니면 일부러 찾지 않을 이 길을 잇달아 두 번을 걸어 내리니, 어쩌면 지리산 자락 첫 동네 음정 부락이 그리워 질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시멘트로 포장된 삼정리 마을길이 보이고, 새로 밑창 갈아 신은 발바닥이 조금씩 따가워 올 즈음에 김대장과 함께 걷는 진달래 능선길 아래에는 김치국밥과 소주가 기다리며 지친 산꾼들의 허기진 발길을 어루만져 주었다.



9/26 배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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