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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9회 일출 삼도봉

05년 12월 31 - 06년 1월 1일

                  2005 12/31        22:00      신도림 출발

                  2006 01/01        04:00      부항령 출발

                                          05:30       전망바위(1000)

                                          07:00       1170.6 봉

                                          08:50       삼도봉(1177) 도착-아침식사,휴식(40분)     8.2km

                                          09:30       삼도봉 출발

                                          09:50       삼마골재(물항계곡 갈림길,심미걸재)        0.72km

                                          10:25       1123.9봉  

                                          10:55        밀목재                                               1.28km

                                          12:00       1089.3봉                                              2.6km

                                          13:00       1175  봉  

                                          14:00       석교산(화주봉,1201)                             2.9km

                                          14:30       1162봉

                                          15:40       질매재(우두령730)                                3.55km                                             

                                                                                    총 11시간40분     19.25km



설송

12월 31일_토_22:00 

 대간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나고 벌써 지리-덕유를 끝내고 이제 새해맞이 삼도 일출 산행을 떠나는 내 맘이 어느 때 보다 설레고 즐겁다. 며칠 전 물푸레의 동행 의사를 접하고 다소 긴 구간이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의미 있는 새해 출발을 함께 할 수 있음에 반가울 수밖에. 지난주 크리스마스이브를 홀로 보낸 것이 맘에 걸린 탓인가, 나이 들어가면서 함께 지내는 여행이 많을수록 좋겠지. 아무튼 2006년의 출발이 즐겁고 힘차게 이뤄지며 신도림역 주차장에서 함께 해장국을 시켜놓고 이슬이를 브라보 한다. 

 "결혼 후 25년 동안 묵묵히 일구어 온 가정의 행복에 감사하며, 50대의 새로운 행복을 위하여 

건강하고 항상 웃음으로 가득한 나날이 되기를!!!!" 

 새해맞이 의미 있는 휴일을 9번째 대간 여행에 바치는 자유인 산악회원들의 인사가 활기차다. 26산케들은 새해 첫 산행을 백운대로 택했다는 김대장의 안부 전화에 많은 산케들의 참가를 기대해 본다. 그동안 산행대장으로, 또 금년 한 해 산케 회장으로서 여러 가지로 애씀에 고맙다. 혜운(惠雲, 법명)처럼 마음 두둥실한 자비로 은혜로우심 이리라.

 안성휴게소를 지나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2005년을 아듀 하고, 한 해 한 해가 아쉽도록 늘여 살고픈 2006년을 맞으며 눈썹이 하얗더라도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상큼하고 개운하다. 3주 연속 대간을 위하여 체력 유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연말연시를 비교적 술자리를 피하고 보낸 덕분이다.    


1월 1일_일_02:00 

 대진 고속도로 무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차량이 37번 북쪽 금산 쪽으로 십오 분여를 잘 못 달리고 있다. 다행히 반대로 돌려 휘황 찬란한 트리가 밝히는 무주 시내를 지나고, 30번(진안-부항령-성주)과 37번(금산-빼재-거창)이 함께 하는 설천 쪽으로 이십여분 달리니 나제통문 갈림길에 다다른다. 다음 주에 이어갈 빼재-대덕산 구간을 오른쪽에 남겨 놓고, 새해 일출의 의미를 담고자 왼쪽 통문을 거쳐 부항령 쪽으로 십여분 달려 새로 단장된 삼도봉 터널 김천 쪽 소공원에 다다른다.(02:40) 1시간여 잠을 더 청한 후에 부항령 마루금을 향해 오름길 밤길을 준비한다. 10년 전 경부 고속도로 영동을 거쳐 무주리조트에 이르던 지방도들이 이젠 사방으로 통달되어 고속도로와 연계되니 대간 길 여행 내내 이 땅의 교통 발전에 감사한다. 

1170봉 아래 목장의 새벽


1월 1일_일_04:00 

 삼도봉 일출을 기대하고 출발하는 대원들에게 축복을 내릴 듯, 눈비를 예상하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기온 또한 지난주까지의 강추위를 겪은 탓인지 포근함을 느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다. 그러나, 일단 마루금 능선에 올라가서 판단할 일이다. 스팻츠와 아이젠을 착용하면서 아직도 녹지 않은 남서부 지방의 쌓인 눈을 예상하지만, 지난 주와는 달리 러셀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쌓인 눈도 다져져 한결 편하리라 예상을 하며 가벼운 맘으로 나서 본다. 단지 장거리 산행에, 특히 무박 산행에 처음으로 용감하게 동행하는 물푸레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열의 후미에 위치한다. 

 대간길 부항령 능선까지의 십오 분여 오름길에서 이미 등에 땀이 고일 정도로 포근한 날씨다. 무풍면

쑥병이 마을과 부항면 가목 마을을 넘나들던 꽤 높은 고갯길이, 이젠 삼도봉 터널로 이어지고, 대간을 위해 이리 힘든 오름을 맛보아야 하지만, 대간길을 보호하고, 자연 생태계 보전에는 적합한 개발로 항상 바라는 바이다. 부디 모든 고갯길이 차도로 끊김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대간길 능선에 올라서니 멀리 부항면 쪽 불빛이 따르고 무주 쪽은 어둠에 잠겼다. 몇 기의 묘를 지나는 동안 된 오름을 맛보고 나니 선두조가 사라지고, 물푸레와 단 둘이서 편한 발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점점 된 오름이 다시 시작되고 깊어지는 마루금 눈밭을 피해 지그재그의 러셀로 밤길이 끊어지곤 하면서 엉뚱한 비탈길을 밟기도 한다. 선두조를 놓친 갈림길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올라선 전망바위(1030봉, 05:30)에서 휴식을 취하던 선두조와 합류한다. 

 첫 워밍업에서 물푸레의 컨디션을 확인한 후 선두조에 바싹 따라붙게 먼저 보내고 뒤로 처진다. 부디 삼도봉까지 제 컨디션을 조절하여 무리가 없길 바란다. 새해맞이 산행을 홀로 보내기가 안쓰러워 따라붙어준 맘에 감사하지만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이는 장거리 산행이다 보니 리듬을 잃을까 봐 걱정된다. 

 암릉 내리막길을 벗어나자 맑던 하늘이 서북풍에 실려오는 눈보라에 흐려지며, 작은 안부를 지나자마자 제법 세찬 바람마저 불어온다. 땀에 배인 잔등과는 달리 귀가 시려온다. 별마저 가려진 초순의 칠흑 밤을 걸어 오르며, 해를 넘기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내 삶의 길에서 버텨주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어떤 종교에서는 삶을 버리라고 가르치던데, 또는 삶에 지친 자들에게 근면, 성실로 망각하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다들 죽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적어도 내 두 발로 버틸 이 땅 위에서 내가 품었던 영웅들을 다시 만나고, 영혼을 되찾는 그날까지 내 의지로 사고하리라.

삼도 가는 길-일출


1월 1일_일_07:00 

 제법 세찬 북쪽 바람에 실려오는 안개 눈 속에서 허덕이며 올라선 1170 봉엔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위를 조망할 시간도 되었건만 추위 탓에 앞선 대열들이 꼬리를 보이질 않는다. 선두를 잘 따라붙는 물푸레가 궁금하지만 페이스 조절만 잘하면 큰 무리는 없으리라. 평소 강한 인내를 믿으니까.

 주 마루금이 쌓인 눈으로 길이 막혀 왼쪽 잡목 사이로 이루어진 러셀을 따라 십여분을 비켜 걸어 내려오니 넓은 평지가 펼쳐지며 목장 자리를 내려다보는 안부에 다다른다. 미리 총대장의 주의 설명이 있었던 터라 좌우를 살피며 희미한 새벽의 여명 속에서 대간 길을 살피고 있으니, 왼쪽에서 선두조의 불빛이 거꾸로 올라온다. 잘못된 눈길 러셀을 빨리 눈치챈 선두 조장의 지시로 다행히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오른쪽 대간 능선까지는 어쩔 수 없이 깊은 눈길 탈출이다. 십여분 정확한 판단을 위한 머뭇거림에 손이 시려오지만, 아직은 생생하게 선두를 따라붙는 물푸레를 만나니 안심이 된다. 

 조금씩 밝아오는 동녘 하늘에서 맑은 일출을 기대하며 둘러보니, 북서쪽 석기봉 하늘은 눈보라에 휩싸인 채로 금방이라도 한바탕 눈을 쏟아부을듯하지만, 다행히 남동 하늘은 가야산 부근부터 선명히 드러나는 산마루 위에 한 뼘 정도의 얇은 구름 띠를 남겨 안타까운 바람을 버리지 못하고 잡목 숲으로 사라질 눈길을 염려하며 카메라 앵글을 유지한 채 발걸음을 멈춘다. 

 점점 밝아오는 새해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멀리 보이는 삼도봉 정상을 향해 싸리 잡목 숲을 지그재그 운행을 하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훨씬 느린 진행이다. 점점 뒤처지던 물푸레와 합류하게 되니 한 손에 익숙지 못한 두 개의 스틱을 들고 어색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걱정이 된다. 


 우즈벡에서의 이튿날 , 이른 봄 고원 사막성 아침 날씨는 예상보다 상쾌했고, 적당한 습도를 제공했다. 맑은 날씨에 며칠간의 골프 여행을 포기하고 K노인을 따라나서며 그의 본격적으로 계속되는 지난 삶들의 자취들을 듣기로 했다. 농장 비닐하우스 설치 공사에 투입될 인부들 중에서 4-5명의 남자들을 뽑아서 오전 동안 골재 조립 기초교육을 진행하고 간단한 점심식사 후에 실습을 시키고 풀섶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한다.
 톈산산맥으로 향하는 자동차 도로에 접한 농장인 탓에 제법 지나가는 차량의 댓 수도 만만치 않아 소음을 내기도 하나 그리 싫지 않을 정도다. 몽골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은 탓인지 얼마 안 되는 한국인의 생김새가 낯설지 않은 작업 인부들의 모습이다.
 “농업이 사양 산업이 될 수는 없지....” K노인의 손에서 1m 남짓한 2개의 모형 형강 파이프가 십자로 결착 조립되어 연결법을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명산업이고, 세계 땅 덩어리 중에서 생명 발육이 년 중 6개월 이상 멈추는 자연조건의, 북반구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데, 이 기간에도 생명은 이어가야 되겠지 그럴려면...... 과거 일본은 40여 년 전에 신일본제철, 미쯔비시 몬산트 등이 시설재배용 형강 개발과 피복재 등 규격품 개발을 선도해 나갔지. 헌데 지금 우리나라 포철이나 삼성에게 농업분야에 대한 관심을 기대한다면 가능할 것인가.. 한심하지.. 강풍과 폭설에 대비해야 할 농업용 하우스가 겨우 공업용 쇠 파이프의 변용으로 값싸게 버티고 있으려니 언젠가 작물 피해와 손실이 엄청나겠지..... “
 K3 형강이라 이름 지어진 그의 발명특허품 골재는 결국 30여 년 만에 중소기업을 통해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저...어르신...헌데....오래전부터 이 분야에 매달리신 것 같은데....”
 골재 설명에 빠져들면 끝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돌려, 화제를 전쟁 이후의 K노인의 궁금했던 삶으로  조심스레 유도해 본다.
 “내가 무슨 공학도도 아니고... 그냥 살다 지쳐 농삿일에 관심 두었는데 어느 날 내가 농사는 팽개치고... 쇳조각 만지는 일로 죽을 때를 기다리니..... “
 회한의 얘기를 꺼집어 내기까지는 긴 한 숨이 여러 번 필요했다.  


삼도봉을 500여 미터 남겨둔 오름길 턱에서 삼거리 이정표를 처음 만난다. 오른쪽 부항면 해인 산장을 내려가는 삼거리 이정표다. 삼도봉을 중심으로 물한계곡과 설천면으로 갈라지는 고갯길이다. 이제부터 어느 정도 안내 표시가 잘 이루어질 모양이다. 계단 오름의 흔적을 눈길 속에서도 짐작이 가고 이후 정상까지의 오름길은 비교적 양호하다. 무성한 잡목 숲을 지나지 않아도 되니, 식사시간을 지나 허기가 밀려온다.

삼도봉에서

1월 1일_일_08:50 

 예상보다 한 시간 정도 도착시간이 늦어 정상 바로 옆에서 바람을 겨우 피한 채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려 정상 탑 주위에서 주변을 조망하고 맑아진 하늘을 바라본다. 정상에 세워진 삼도 화합 기념탑은 너무 화려한 느낌이다. 사치스러운 화합 기념탑이 가져올 의미 또한 화려한 잔치로 끝나지는 않을까,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모든 가치 기준들이 가면을 쓴 채로 장식으로 꾸며진 것처럼. 

 지리 삼도봉(날라리봉-전남. 북, 경남)을 지나왔고, 다음 주 대덕 삼도봉(초점산-경남. 북, 전북)을 거쳐 오겠지만, 이곳 삼도봉은 지리적으로나(충북 영동-전북 부주-경북 김천) 역사적으로(마한, 변한, 진한) 확실한 삼도의 중앙을 점하며 이 땅의 심장부라 일컬을 만한 위치에서 두루 연봉을 거느리고 있다. 민주지산 (岷周之山)의 이름이 참 잘 어울리는 위치다.

 북으로 석기봉과 각호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남으로 멀리 가야산과 수도산이 선명하다. 수년 전, 폭설과 함께 강한 바람 속에서 6명의 공수 특전단 대원마저도 잠들게 했던 석기봉 산허리에서 만만치 않은 바람이 일렁이니 새해 소망을 빌며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정상을 아쉬운 마음으로 뒤로하고 삼마골재(심미걸재)로 내려선다. 어느 여름날, 시원한 물한계곡으로 올라오길 다짐하면서...(09:30)    

밀목재-석교산 화주봉 능선


1월 1일_일_09:50 

 삼도봉에서 오른쪽으로 대간길을 나아가니 급한 경사길 아래 물한계곡 갈림길이 보인다. 이십 여분만에 깊은 눈길을 조심스레 내려 밟으니 해인 산장과 미나미 골 안내 표시가 보이고 일부 탈출팀들의 안내 표시를 마치고 전망바위에 올라서서 과일을 나눠 먹으며 잠시 숨을 돌린다. 유난히 많은 싸릿가지 길을 헤쳐 나가며, 대간 마루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지그재그로 진행하는 행보가 점점 느려지고 힘이 든다. 

 잠시 휴식 후 선두조와 간격이 멀어진 채로 잡목을 헤쳐 오르니 1123봉에 다다르고(10:25) 대간 표시 리본이 많은 오른쪽으로 급히 떨어지니 러셀도 무의미한 깊은 눈 속으로 몸을 날린다. 이후 삼십 여분 간 밀목재까지의 내리막은 지나온 산마루 허리를 조망하는 급 우회길이다. 점점 기력이 지쳐가는 물푸레의 발걸음이 늦어지고 유난히 뒤를 낚아채는 가지들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에 걱정이 된다. 이제 7시간, 아직도 서너 시간은 족히 남았는데.(11:00)

 밀목령을 지나 비교적 평탄한 오름길에서 마주하는 봉우리들 뒤로 1175봉이 유난히 뾰족하다. 여름철 제대로 이루어진 마루금 밟기라면 벌써 올라 섰어야 할 시간에 겨우 잡목 숲을 지나니 1089봉에 이른다(12:00) 이후 작은 봉우리를 지나 1175봉 꼭대기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던 총대장을 만나 숨을 고르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삼도봉이 까마득하고 왼쪽 물한리 마을이 가깝게 보인다.(13:00)

 석교산 화주봉으로 착각하리 만큼 높이 솟은 1175봉에서 잠시 쉰 후 마주 보이는 화주봉을 향해 오른쪽으로 발길을 내디디니 지도상의 위험구간 표시를 떠올릴 만큼 낭떠러지 직벽이다. 총대장이 우리 부부를 기다린 이유를 깨닫는다. 줄잡이에 익숙지 않은 물푸레를 가운데 세우고 미끄러운 직벽 암릉을 한 발씩 조심스레 디디며, 서너 차례의 긴 로프 잡이를 끝내니, 이어지는 눈길 급경사에서도 다리가 떨리는 모양이다. 조심조심 내딛으며 삼십여분을 내려와서 다시 올려다 보이는 화주봉 꼭대기가 유난히 높아 보인다.  

1175봉

1월 1일_일_14:00 

 세찬 바람에 눈마저도 날려간 듯, 석교산 화주봉 정상엔 적설량이 많지 않고 전망이 좋다. 힘들게 내려온 1175봉을 돌아보니 내림길이 깎아지른 듯하다. 지나온 여러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젠 지도상에 내리막 한 시간 정도면 질매재(우두령)에 닿는다. 

 물푸레의  한마디 푸념처럼 "이해가 안 되는..." 이 발걸음은 무엇을 향한, 어떤 의미를 찾아서 옮겨가는 힘든 길을 계속하고 있을까. 역사를 이어 온 민족의 고난과, 이 땅과 저 하늘과 모든 이웃들에게 끊임없는 변화와 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존재할 수도 없는 영원불멸의 선과 악이라도 찾고 싶은 것일까, 과학자 한 사람으로 시작된 혼돈이 어지러운 요즘, 이런 높다란 곳의 희망은 어느 고귀한 학자들의 혀 끝에서 정신의 사치스런 향락으로 치부되겠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를 순간적인 쾌락 속에 그냥 넘기기엔 아까운 삶을 위하여 천 가지 목적을 버리고 하나의 목적을 마련하고 싶은 것일 게다.

 화주봉에서 질매재로 향하는 내리막 눈길에서 잠시 우회길을 거부하고, 밟지 않은 마루금 눈길을 러셀 하며 여유도 부려 본다. 멋모르고 뒤따르던 물푸레가 눈 속에 파묻혀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고통의 긴 시간이 끝나가는 시점이다. 멀리 우두령 포장길이 겨우 눈에 들어오는 1162봉에 내려서니(14:30) 급격히 지친 물푸레의 발걸음이 매우 느려진다. 이제 선두조와는 1시간 정도 차이가 날 것 같다. 서둘지 않고 천천히 옛날 얘기들을 곁들여 가며 피로를 잊어 본다. 


 전쟁이 끝난 해 서울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바삐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발걸음들이 내뿜는 정신없는 열기로 시간을 정지시켰다.
 이듬해 봄, 전쟁 중의 모함 사건 결과가 어처구니없게도 아내와 딸을 잃은 결과로 남게 된 K노인은 한동안 삶의 방향을 잃은 듯이 통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젊은 아내와 갓 돌 지난 아들의 눈망울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우연히 만난 친구의 소식으로 고집불통의 우국 혼으로 불리는 류림(柳林) 선생의 환갑잔치에 참석을 하게 된 이후 K노인의 제2의 인생이 새로운 출발점을 맞게 된다.
 훗날 그의 아들 류원식은 5.16 쿠데타에 참가하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원을 거쳤으나, 살아생전 아버지 류 림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비극이다.
 해방되든 해 겨울 그의 귀국 모임에서, K노인이 모시던 이시영 선생 소개로 잠시 인사를 나누었으나, 워낙 어려운 관계라 직접 가르침을 받지도 못한 채, 단지 이시영 선생의 표현에 따라, 고집스런 무정부주의자로 기억되어 전쟁의 와중에서 잊고 지냈던 시간이었다.
 이후 쇠락한 정치인, 류 림의 그늘 아래서 비록 5-6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독립 노동당의 가늘어진 명맥을 이어가며 이 땅의 혁신세력의 몰락을 지켜보아야 했다.  
우두령 내리막길

1월 1일_일_15:40 

 한 시간 여의 느린 걸음으로 지친 발걸음을 내디뎌 무사히 도착하니, 우두령 고갯길 야생 동물 이동통로 굴다리에 정차한 버스 곁에서 따스하게 끓인 국물로 반겨주는 대장과 동료들이 고맙다. 물푸레도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참 장하고 자랑스럽다. 첫 무박 산행을 무사히 완주해낸 것이다. 중간에 탈출시키지 않고 함께 걸어왔음이 보람을 느낀다. 모진 신랑 만나서... 

 "집으로" 영화 촬영 장소인 상촌리 마을을 거쳐 물한리 계곡길을 꾸불거리며 서울로 향하는 발길이 바쁘다. 이제 경부 고속도로 황간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지난 넉 달 동안 이용하던 대진 고속도로를 완전히 벗어난다는 기분이 왠지 섭섭하다. 다음 주 무주 빼재-부항령을 끝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2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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