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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5회 덕유 종주_2

05년 11월 12-13일

                11/12  22:00 신도림역

                11/13  02:30 빼재 신풍령 휴게소

                          03:40  빼재 출발 산행시작

                          04:10  1039 고지                                          1.35km

                          04:30  헬기장

                          05:00  갈미봉(1,210m)                                   1.5km

                          05:30  대봉(1,263m)                                      0.93km

                          06:00  월음령(달음재)                                   1.0km

                          06:30  지봉 (1,342m)                                     0.87km

                          06:45  싸리듬재-아침식사, 휴식-07:45 출발

                          08:10  횡경재-송계사 탈출 지점                      1.45km

                          08:30  귀봉 (1,400m) 

                          08:50  상여듬

                          09:20  백암봉(송계삼거리, 1,490m)                  3.65km

                          09:40  중봉(1,594m)            

                          10:00  향적봉(1,614m) -10분 휴식                    2.0km

                          10:30  중봉

                          10:50  백암봉                                               2.0km

                          11:40  동엽령                                               2.2km

                          12:40  병곡리 계곡                                       

                          13:00  빙기실 마을                                        4.0km 

                                                               총 9시간 20분       20.95km



동트는 월음령

11월 12일_토_22:00 

 덕유 종주의 마지막 구간을 준비한다. 늦가을 저녁 날씨 치고는 꽤 포근하다. 대간 첫날의 흐린 날씨 외에는 금번 회차까지 야간등반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쾌청한 날씨가 다행스레 여겨진다. 매번 2-3주마다 먼길 떠나는 기분으로 대간 여행길이 기다려짐은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간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튼 이제 겨우 대간 길의 초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체력을 유지하고 무사히 진부령에 닿아 기뻐하는 날까지 조심스레 한 걸음씩 옮겨 갈 일이다.

 토요 청계산행 후 회사랑을 위해 모이는 26 산케들의 즐거운 소리가 맘을 유혹하건만, 아직 내가 술잔 앞에서 내 맘을 확실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탓에 저녁 출정을 위하여 전화로 이 전임과 소식을 나누고는, 스웨덴과의 전반 축구경기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낸 후 신도림으로 향한다. 산케의 자랑인 박 변호사의 청문회가 무사히 끝나고 연말 송년 산행에서 버릴 수 없는 그의 성향을 사랑하는 맘으로 확인하고 싶다.

 3주 만에 나서는 대간 自由人들과의 만남은 늘 그렇듯 설렌다. 출발시간 20여분이 남은 시간에 벌써 많이 모여드는 대원들을 보며 참 맑은 삶을 느낀다. 누가 등 떼밀며 시키지도 않은 , 결코 편안하고 쉽지도 않은 이 길을 저리 즐겨 기다리며 나서는 까닭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부디 식지 않는 정열로 동지애를 쌓아가며, 같은 목표를 향하여 제각각의 이야기들을 대간 마루금에 남기며 무탈 산행을 기원해 본다.


11월 13일_일_02:30 

 금번 코스는 지난번 남덕유 코스와는 달리 다소 짧은 대간 구간이라 긴장감이 덜하다. 단지 대간 길을 벗어난 향적봉까지의 왕복 더하기와 동엽령에서의 하산길이 관건이다. 시흥휴게소에서 선배 기수가 제공한 위문 막걸리를 한잔씩 나눠 마시니, 덜컹거리고 비좁은 버스 의자 위 잠깐의 숙면에 익숙해진다. 무주 쪽 차량 길을 확인하려 앞좌석에 앉은 의도와 달리 눈을 뜨니 벌써 신풍령 휴게소에 도달한 버스가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재우려 공회전하며 멈춰 있다.


11월 13일_일_03:40 

 준비체조를 마친 후 빼재 들머리로 향하니, 육십령에서 내가 투덜거린 대간 초입 표지와 시설 투자를 고려해 달라는 민원을 들은 듯이 짧지만 잘 정비된 포장길로 인도된다. 빼재라 적지 않고 秀嶺(수령)이라 적은 돌표지가 어둠 속에서 뽐내고 서있다. 무릇 유식한 선비님들만이 지나는 길에 갓 씌어 놓은 모습이다. 영어 몇 마디 섞어가며 맞선 보는 마담들이 즐겨하는 명동 어느 호텔 커피숍 같은 어색함이다.

 조용한 대간 들머리를 잠든 새들 깰세라 조용히 빠져 오르니 다소 뿌연 하늘에 아직은 별빛이 높다. 능선 왼쪽에 잠든 개흥 마을 대여섯 불빛만이 간간이 동행하는 1039 고지 안부 까지는 그리 가파르지 않은 대간 초입을 맛보며, 덕유 본연의 크고 편안한 맞아들임을 느낀다. 지난 남덕유의 번쩍거리는 암릉 초입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육산 특유의 부드러움에다 떨어진 낙엽이 더욱 풍성하니 마을 뒷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단지 헤드랜턴에 비추이는 잎 떨군 가지들이 파리하게 다가오니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을 느끼며 황망해진다.  


11월 13일_일_04:30

 1039 안부를 지나 20여분 땀을 흘리니 헬기장 너른 자리에 다다른다. 외투를 벗어 넣고 소등한 채 다시금 올려다본 하늘에서 별밭을 확인한다. 서울을 벗어난 즐거움인가.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고, 눈앞에 춤추는 네온에 도취되며, 어른거리는 빛 속에서 화려한 꿈에 젖어 살아가는 도회인들의 전형에서 오늘 쉽게 벗어나는 내 고개 짓이여. 젖혀진 목으로 한참을 머문다.

 다시금 추스른 몸으로 부드러운 오름길을 재촉하니 멀리 오른편으로 높다랗게 대봉이 솟아있고, 보름이 가까워 오는 듯이 어슴푸레 느껴지는 대간 산마루가 어둠 속에서도 정겹다. 한 시간 이상 걸으며 따라붙는 거창 오지 마을 들의 불빛이 그 동네가 그 동네 같아 한 마을을 계속 뺑뺑이 도는 느낌이다. 그렇다, 만사 평온한 삶은 한 곳에 머물며 저리 고요하게 제 자릴 지키는데 괜히 서투른 몸짓으로 터 바꾸는 낚싯꾼 마냥 초조히 무얼

바라고 이 밤길을 헤매는 건 아닌지. 투구봉 갈림길에선 대봉에서의 조망이 한결 여유롭고 장관이다.(05:30)   



싸리듬 일출

11월 13일_일_06:00

 대봉에서 남쪽을 향하여 꺾인 경사면을 밟아 내려온다. 멀리 지봉(못봉)이 거대하게 앞을 가로막으며 걸어 나아갈 길을 어둠 속에서나마 다 가린다. 월음령(달음재)까지의 평탄한 내리막길을 30여분 편안히 걸어간다. 낙엽에 감춰진 내리막 길 돌더미에 미끄러지면서 발목 조심을 외치다가, 아뿔싸 머리 조심을 잊어 낮은 가지에 걸린 머리가 따갑도록 통증이 느껴진다.

 인생의 길도 이처럼 어둡고 앞을 가리지 못하는 중생들의 놀음이련가.


 우기가 끝나지 않은 우즈벡의 3월 초 이른 봄날의 저녁은 제법 쌀쌀함을 느끼는 가운데 갑자기 축축해지며 가랑비를 뿌린다. 그러나 다소 분주해 보이는 까페 안 쪽의 소란함을 피해서 나와 앉은 테라스의 파라솔 아래에는 K노인과 나 밖에는 없는 것이 한가하고 조용해서 좋으나, 단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뜨지 않고 주전자를 든 채로 시중드는 젊은 러시아계 미녀가 부담스럽도록 친절하고 매력적이다.
“전쟁... 참 지겹도록 오래 끌었지.... 이 한 몸, 인생 전부가... 망가졌으니... ”
 조금씩 취기가 오르며 노인의 눈길이 머무는 쪽을 향하니, 먼데 차르박 호수 넘어 헐벗은 사막의 민둥산에서 50년 전의 우리 땅을 기억해 낸다. 포성이 들려오고, 민중들이 까닭 모른 채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던 1950년, 가난한 동쪽 나라의 헐벗은 역사가 밀려온다. 역사 속에서 한 3년, 참 짧은 사건 정도로 취급되어 언젠가 한 줄 기록으로 잊혀질 작은 아시아의 동쪽나라 한스런 이야기가, K노인에겐 팔십 평생을 다 차지하고도 넘쳐흘러 이곳 서쪽 아시아 징기스칸의 발자국마저도 물들이는가.
 해방 후, 큰 뜻은 품지 않았으나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주요 보직을 맡았던 K대학이 부산 피난지에서 가짜 졸업장 장사를 벌이는 것에 한심스러워, 스스로 절 싫은 중처럼 빠져나와 잠시 호구지책으로 얻었던 선생 자리가 그렇게 혹독한 이 땅의 역사 속에서 독약 같은 먹이가 될 줄이야.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K노인에게 남은 것은, 젊은 새 아내와 갓 난 아들, 그리고 객지에 버려둔 첫 아내와 여섯 살 배기 첫딸에 대한 피나는 기억뿐이었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황해도에서 18살에 서울로 유학 와서 연애결혼하고 전쟁이 시작되자 신랑 고향인 장수군 적상면으로 피난 왔다가 징집되어간 남편이 두 달 만에 종이쪽지로 날아들고, 먹고살기 힘든 시댁 동네에서 버티기 힘들어 산 넘어 객지 마을로 찾아들어 홀로 연명 중에 엉뚱한 산 손님을 맞게 된 새 아내를 데리고 정릉 산동네에 그나마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다행스레 연락이 닿은 후배들의 도움이었으니 참 다행한 일이었다.
 비록 기름 먹인 푸대 종이로 가린 움막집일지라도, 미아리 고개를 넘어 다니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몇몇 지기들을 만나 소식 끊긴 첫 아내와 딸을 찾아 나서는 K노인의 아침 발걸음은 늘 분주하고 힘이 찼다. 어쩌면 30여 년 삶에서 무조건 뛰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가장 정신없도록 분주하게 돌아다닌 시절이었다. 다행히 선배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필경사로 취직되어 적으나마 봉급을 받게 되고 입에 풀칠 걱정은 들었으나, 부산 국제 시장에서 얼핏 비췄다는 첫 아내와 첫 딸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도 여러 달, 이미 서울 수복 후 자기 고향으로 제 각각 돌아가 나름대로 생사확인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에서 그해 겨울의 첫눈은 왜 그리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지.


달음재를 지나(06:00) 지봉으로 오르는 비탈이 꽤 지겹다고 느낄 즈음에 송계사 계곡 쪽에서 어슴푸레 동이 터 온다. 몇 주 전 화려하게 대간길을 장식하던 단풍들이 그새 힘을 잃은 채 오므려 들고, 잎 떨군 가지들 사이로 계절이 불어오는데, 발끝에 느껴지는 낙엽의 바스락 거림이 내년 봄 다시 만날 대간 또 다른 곳에서의 움틈을 기약하듯, 한그루 푸른 솔잎에 온 산을 내맡기고 벗은 채로 정상을 내보인다.


11월 13일_일_06:30

 池峰(못봉)에 붙여진 명칭 때문에 여러 산행객 들을 고심하게 하건만 둘러보아도 어디 못자리로 일컬을 만한 연유를 발견치 못하고 동트는 갈미봉을 내려다보다, 발아래 진행 방향의 헬기장 자리가 차라리 못자리 마냥 평편하다고 느끼며 아침 식사를 위해 서두르는 선두 조를 따라붙는다. 지봉을 내려서 10여분 내려서니 싸리듬재 언덕배기 넓은 자리에 휴식을 취하며 아침식사를 맛본다. 다섯 차례의 힘든 여행 속에서 함께 끓여 마시는 라면 국물 속에서 잔잔한 동지애가 끓어오른다.(06:45)


11월 13일_일_07:45

 한 시간 정도의 충분한 휴식과 아침식사 도중에, 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맑은 일출을 디카에 담으며 연속되는 맑은 날씨에 행운을 느낀다. 3대 덕을 운운치 않더라도 부디 1년 반 동안의 여정에 도움 되는 일기로 남아주길 빌어본다. 수북한 낙엽 속에서 깊어가는 계절의 자락을 쓸며, 지난여름의 짙은 녹음과 몇 주 전의 화려함이 영욕의 시간 속에서 어쩔 수없이 허물어져 가는 윤회를 느낀다. 어데선가 낙엽 태우는 냄새처럼 긴 궐연 한대

태우는 추억이 감지된다.

 고개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오름길에 마주한 횡경재에서(08:10) 송계사 쪽으로 탈출할 일부 대원을 남기고 귀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쉬운 산은 없다 했든가, 특히 대간 길에서. 식후에 마주하는 오름 길은 늘 숨이 차다. 꽤 길다고 여겨지는 오름길을 20여분 헐떡거려 오른 귀봉에서 마주 보이는 향적봉이 참 가깝다고 느끼며 백암봉 송계삼거리가 되려 높아 보인다.

 앙상하게 남은 철쭉 가지들을 헤치며 봄날의 화려함을 상상할 즈음에 상여듬 안부에 다다라(08:53) 백암봉에서 대간을 벗어난 향적봉을 왕복할 것인지 고민해 본다. 계획상으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리라 여겨지던 오늘 구간에서 왠지 긴 오름에 지쳐오는 피로를 느낀다. 그러나 마주 보이는 덕유평전의 아름다운 능선 허리가 곡선에 약한 나를 유혹한다.


11월 13일_일_09:20

 백암봉 정상, 동쪽  대간길과 덕유 정상 향적봉의 갈림길인 송계삼거리에서 쉴 새 없이 오른쪽 평전을 향하고 향적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배낭을 벗어 놓고 먼저 떠난 일행들을 뒤쫓으며 배낭을 벗기도 귀찮아서 그냥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음 날을 위한 훈련이란 기분으로.



11월 13일_일_10:00

 대평원, 대간길 곳곳에 만나는 산마루금 평전 중에 으뜸이라는 덕유의 포근함 속에서 잠시 피로를 잊는다. 중봉으로 오르는 평탄한 계단 오름 길에서, 언젠가 눈밭으로 꾸며진 계절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무주 설천봉을 거쳐 다시 넘어오리라 다짐해 본다. '이리도 아름다운 길들에 하나하나 욕심내면 대간 길 다시 다 밟고 말겠다. 사랑하는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중봉을 넘어 향적봉 정상이 손에 잡히는 곳에 선채로 주목과 고사목이 펼치는 자연을 감상한다. 산 자와 죽은 자, 서로 기댄 채로 저리 영원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데,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인가. 삶의 허물이 남기는 아픔마저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저 고사목처럼 생생한 영혼들과 함께 섞여 영원을 꿈꿀 수 있을터. 내 삶의 의미와 의지를 찾아 떠난 대간길 산중에서, 만나는 모든 한 걸음 한 걸음의 아름다움들이 아픈 무릎을 잊게 하고 , 내 지치고 메마른 가슴들을 적셔 삶의 끝자락을 평안한 안식의  길로 이끌어 줄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날까지, 이 땅 끝까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용기가 난다. 어느새 없어도 좋을 듯한 철탑 안테나를 지나 덕유 정상 향적봉에 다다른다. 


11월 13일_일_11:00

 향적봉 정상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설천봉을 거쳐 오른 가벼운 차림의 여행객들로 많이 붐빈다. 정상 돌탑에서 한 컷을 기대했지만 틈이 없어 그냥 신식 목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만족한다. 발아래 설천봉에서 이병옥 원장과 설광용 선생의 색소폰이 나를 반긴다. 여럿의 벗들이 어울려 설천봉 짙은 안갯속으로 추억 놀음을 떠난다. '다음 주 가야산행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서둘러 삼거리에서 기다리며 있는 일행들을 생각하며 백암봉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느긋하게 간식을 끓이는 산꾼들의 찌게 냄새가 부럽다. 


이듬해 봄, K노인은 교직 신분의 보다 나은 취직을 위해 전쟁 중의 사건에 대한 확실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수소문하여 경남 도경에 선이 닿아 자신의 탈주 사건에 대한 당시 처리상황을 확인한 결과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접하곤 몇 날 며칠을 통음하며 배회했다.
 K노인을 군부대에 인계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담당자들은 문책이 두려운 나머지 K노인을 훈방 조치한 것으로 꾸미고, 오히려 신고자인 박장군이란 친구를 무고죄로 기소하여 1년여 옥살이를 치르게 했다는 소식이다.
 “이런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
 긴 한 숨 속에서 기막힌 억울함이 배어 나왔다. 숨어 살은 지난 2년 여. 그리고 훈방되었다는 사람이 이유 없이 돌아오지 않아 어린 딸을 들쳐 업고 타향을 등져야 했던 첫 아내의 기억들은, K노인으로 하여금 한동안 밤만 되면 술에 취해 산 쪽으로 산 쪽으로 짐승 울음으로 헤매고 다니게 만들었다.
 아무리 부질없는 삶이라지만, 부초처럼 물결에 휘말리다 떠내려갈 운명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너무하다, 이럴 순 없다...”라고 온 산을 헤매며 외치는 그를 어느 누구도 붙잡아 줄 수 없었다. 오직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쳐다보는 젊은 아내와 젖먹이 아들만이 그를 쓰러지면서라도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영혼이었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무얼 바랬던가.. 내가 무슨 큰 뜻을 도모하여 남에게 작은 원한을 남겼던가.. 남들보다 그리 잘 난 척도 한 적이 없고, 그냥 착하다는 소릴 들으며, 공부도 제법 열심히 했고... 해방 전 어린 시절에 사범학교 졸업 시 일장기 앞에서 깎은 머리로 기념사진 찍고 일본 군복 차림으로 교단에 서야 했던 잠시 동안의  기억마저도 아직은 부끄러운 내 잘못으로 느껴지질 않는데.....
 기억조차 하기 싫을 만큼 휘몰아치는 세상의 뒤죽박죽 속에서 조금씩 싹이 돋아나는 K노인의 원한 서린 고집들이 결국 다시금 어린 시절의 사상마저도 추궁당하는 한의 삶으로 점점 더 빠져들고 있었다. 


지나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지루함도 느끼지 못한 채 덕유평전을 뚜벅거리며, 왠지 피로와 함께 밀려오는 대간 구간의 마지막 평온함을 맛본다. 언젠가 다시 꼭 오겠다는 이 길이 왜 그리 아쉬운지 자꾸만 고개가 뒤로 돌아가며 걸음이 느려진다. 


11월 13일_일_11:40

 백암봉에서 동엽령으로 내려서는 대간 구간 마지막 내리막은 무척 지루하다. 산정에서 매우 가깝게 보이던 산허리가 넘고 넘어도 동엽령 높은 고개를 보여주질 않는다. 지난 구간 무룡산에서 내려올 때는 빤히 보이면서도 그리 멀더니만. 그나마 아직은 10 시간을 채우지 않은 탓인지 무릎엔 이상이 없다. 단지 조금씩 따가워

오는 평발의 비애를 맛보며 빨리 계곡이 나타나 찬물에 담그고 싶다. 

 먼저 하산한 선두조가 기다리는 탓에 쉴틈 없이 내려서는 병곡 계곡으로의 하산길은 매우 가파르다. 미시령 고갯길 마냥 지그재그로 생겨난 등산로가 낙엽에 묻혀 어지럽다. 반대편 안성 쪽 칠연 계곡 하산길이 지루할 만큼 길게 뻗어 잘 애용되는 이유를 알겠다. 이쪽의 급경사는 등정 시나 하산 시 모두 힘든 난코스라 등산객들에게는 환영받기엔 무리다. 무수히 쌓인 낙엽 경사를 미끄러지듯 한 시간여를 지쳐 내려오니 병곡 계곡 맑은 물에 다다른다.(12:40) 찬 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얼굴을 닦으니 정신이 맑아진다.

 병곡계곡. 이 계곡의 끝에는 서너 가구의 빙기실 마을이 있고 계곡 맑은 물에서 키우는 송어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50년 전, 길도 없이 기어오르던 K노인이 마지막 깊은 잠에 들기 전에 먹었던 보리죽만큼이나 맛있는 송어회가...


11/14 배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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