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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6회 지덕 종주_1

05년 11월 26-27일

                 11/26    22:00    신도림

                 11/27   02:30     여원재 도착(24번국도 남원-함양)

                            03:50     산행 시작

                            04:40     합민성터 안부

                            05:50     고남산 정상(846.5)

                            06:00     통신소 헬기장( 10분 휴식)

                            06:40     통안재

                            07:50     매요마을    (아침식사 및 휴식 -50분 )

                            08:50     버들재(유치)                                         10.4km

                            09:50     모래재(사치재-88고속도로)

                            10:30     억새농원-----10:50  묘터(10분간 독도훈련)

                            11:00     새맥이재

                            11:30     시리봉 헬기장 (10분 휴식)

                            12:20     아막성터

                            12:50     복성이재                                                9.6km 

                                                                  총 20km              9시간     


가을결실-지덕1

11월 26일_토_22:00 

 대간길 6회 차, 흐리던 하늘에 간간이 빗살을 뿌리는 음산한 날씨다. 9월 초 첫회차 출발 때 외에는 기상 여건이 매우 좋은 덕분에 지리, 덕유의 황홀한 새벽 일출을 즐길 수 있었는데 오늘은 어떨지. 아무튼 겨울 초입의 날씨에 기온 급강하만 없으면 다행으로 생각하고, 겨울 배낭으로 바꿔 겉옷을 몇 벌 더 챙겨 넣는다. 내일 하산 후에는 부산으로 향하여 모친 제사를 올려야 하니 갈아입을 옷가지가 또 한 벌, 짐이 자꾸 늘어나고 배낭이 꽤 무거워진다. 다행히 이번 구간은 높은 고스락(정상)이 별로 없으니 긴 트래킹에 적응 훈련으로 생각하고 무게를 유지해 본다. 

 함께 출발하지 못하는 물푸레는 미리 전화연락으로 큰 조카들의 제사 참석여부를 체크하며 섭섭해 하지만, 내년 구정 차례상에서 다들 만나기로 하고 홀로 나서는 밤길 대간 출발을 위해 신도림역으로 향한다. 오전에 헬스장에서 워밍업을 조금 무리하게 한 탓인지 다리가 뻐근하지만 익숙해진  차량 취침과 휴식으로 극복되리라 자신감이 생긴다. 자신감(自信感), 스스로를 찾아 떠나는 모든 自由人들에게 가장 절실한 목표 이리라. 自我니 理念이니 따위의 정신적인 물음보다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내 두 다리가 실현하는 육체적 정열 속에서, 이 땅에 닿은 채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설 일이다. 

 날씨만큼이나 스산한 맘으로 계절이 가져다준 허허로움을 느끼며 도착한 신도림에서, 맞잡는 산우들의 손이 유난히 따스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어느 재벌 따님의 허망한 최후를 접하며 인간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저편 세상으로 그리 쉽게 뛰어넘어가는 것을.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인내이며, 무엇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으로 남을 것인가. 아름다움으로 다가와 내 소박한 꿈에 예술을 담아 버틸 자연스러움을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린아이의 도덕 같은 정이 아닐까.

 어느새 새벽을 달린 버스가 지리산 톨게이트를 벗어나 함양-남원 24번 국도에 이르니, 여원재 고갯마루 "운성 대장군"이 한 달만의 재회를 반긴다.(02:30)                                                              

안갯속 황산

11월 27일_일_03:50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산행 버스를 국도변에 새워둔 채로 한 시간여 새벽잠을 아쉬워하는 동안, 서울에서 부터 계속 따라붙던 가랑비와 바깥 날씨가 궁금하여 조용히 차문을 열고 거리에 나서본다. 한 밤중의 장교리 마을 초입은 차량통행도 없는 국도변 큰 길가 집들마저 고요히 잠들었다.

 지난달 지리산 마지막 구간 하산 시 땀을 씻을 물을 보시하시든 **님 댁은 여늬 집들과 달리 대문마저 열어둔 채로 오직 대장군 장승에게 호위를 맡긴 듯 풍요로운 평화를 꿈꾼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비록 약한 안개가 새벽을 덮기 시작하나, 초겨울은 아직 멀었다는 듯이 얼굴에 스치는 새벽바람이 상큼할 정도로 춥지 않게 다가온다. 구간 들머리에 큰 오름이 없을 것 같아 추위를 염려하며 껴입은 외투를 다시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가벼운 출발을 서두른다. 장등제 마을을 끼고 왼쪽 마을 뒷산을 돌아드니, 흐린 그믐달 새벽은 조용히 줄을 잇는 헤드랜턴 행렬이 아니라면 깊고 어두운 숲 속에서 귀신깨나 춤출 분위기다. 

 고려말 왜장 아지발도의 죽음을 가져와 이성계를 도운 여자귀신의 한을 읽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왼쪽으로 돌아 밤길 밭두렁 쇠똥을 밟으며 561.8m 고지에 다다르니 제법 땀이 솟는다. 이쯤에서 혹시나하고 올려다본 하늘엔 희미한 그믐달뿐, 별자리는 없다. 오늘은 일단 일출의 화려함은 접어야겠지만 부디 안개가 걷혀 서부

지리산의 조망을 즐길 행운을 기대해 본다. 어차피 대간길이 화려한 경관 탐방을 늘 기대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먼길 다녀가는 내 디카에 벗들에게 전해줄 이 땅의 아름다움을 몇 컷 담아야 할 텐데.


11월 27일_일_04:40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왼쪽 합민성터로 보이는 안부에 다다라 잠시 길을 머뭇거린 후 가파른 오른쪽 하산길을 10여분 내닫는다. 마치 동네 어귀로 다시 떨어지는 기분이다. 정신없이 급경사를 내려오니 왼쪽 밭두렁을 지나 고남산 정상을 향한 북쪽 방향으로 심한 오름길을 맛본다. 마치 들머리에서 가볍게 여김을 혼내기라도 하려는 듯. '쉬운 대간 길 없구나....' 

 장교리에서 간간이 따라붙던 사람살이 불빛들이 사라지더니 왼쪽 까막재로 통하는 절개지에 이르니 멀리 남원 땅 요천 너머 노봉마을에서 '혼불'이 밀려든다. 누가 남원 땅을 고룡(古龍)이라 칭했던가. 밀려오는 원혼들의 불빛이 시공(時空)을 넘어서니 온통 장관이다. 무덤에서 萬人이 깨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거멍촌 풀무쟁이 금생이가 개혁을 외치고, 강간당한 강실이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효원 며느리와 손잡고 춤을 춘다. 남편 없는 시집에 하얀 가마 타고 시집오든 청암 부인은 이제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며 땅문서를 들고 복덕방 거리로 내닫는다. 

 정신없이 헤매며 가쁜 숨으로 올라서는 고남산 정상 턱에서 만난 두 차례의 암릉 줄잡이는 밤길 초행에는 매우 위험하게 느껴진다. 비에 젖은 암릉 표면의 미끄러움과 육산의 즐거움으로 자칫 해이해진 긴장을 다시금 조이며, 조심스레 슬랩을 기어오르고 hanging 릿지를 거쳐서 고남산 정상에 올라섰으나, 아직 새벽의 동틈이 멀리 있으니 반겨줄 조망도 없고, 보란듯한 표지석도 없다. 어디선가 정상으로 불어 오르는 대숲바람을 느끼며 어둠 속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50여 m 아래쪽 통신대 헬기장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매요 마을-황산벌

11월 27일_일_06:00     

 아직은 여명을 기대치도 못할 겨울 새벽이라, 정상을 온통 차지한 통신소 윙윙 울음소리만 음울하게 들리는 헬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남원땅 한가운데에 섰음을 느낀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런대로 어슴푸레한 그믐달 약한 빛을 그늘 삼는 황산 자락과, 북으로 가로 놓인 88 고속도로의 희미한 불빛들로 입체감을 느낀다.

 정상 통신소까지 포장도로를 개설하여, 굽이치는 회색 길을 두세 차례 가로지르며 끊어진 붓길 같은 대간 마루금을 찾기 위해 약한 그믐달 빛을 끌어당긴다.(引月)

 대간길이 이리도 무시당할 만큼 극히 일부의 놀음으로 치부할 것인가, '대간마루회복 위원회'를 청와대 직속으로 구성하면 민주국가 발전에 도움 될 것인가?

 매요 마을로 하산하는 동쪽으로의 긴 능선에서, 남북을 가르는 작은 마루금을 신기해하며 오른쪽 남쪽  황산벌을 감싸면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이마의 랜턴이 불빛을 잃어간다. 안갯속의 여명이라든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어느새 다가온 여명처럼 우리 삶들을 둘러싸며 이미 곁에 온 행복들을 제쳐두고 이리 산속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통안재를 지나 구불거리는 얕은 능선길에서 간간이 들리는 북쪽 88도로의 소음이 없었다면 사라진 만복사 절터쯤에서 춤추며 새벽까지 노닐던 양생과 노처녀 귀신도(금오신화) 함께 동네 어귀까지 내려올 수 있을 텐데.


K노인이 열두 살 되든 해, 부산과 김해 사이의 구포에서 자릴 잡게 된 것은, 외가 동네 김해 부근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리는 생모를 찾아 군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한 지 한 달 여만의 일이었다.
대 여섯 살 되었을 때 젊은 작은 엄마와 함께 살던 생모가 결국 작은 보따리 하나 든 채 집을 나선 후, 간간히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온 부산을 찾아 나설 때까지, 땅거미 지는 군산 앞바다에서 K소년이 흘린 눈물은 악물고 뛰는 바닷바람 속에서 땟국으로 말라 붙었다.
젊은 작은 엄마가 하나씩 낳아가는 동생들을 돌보며 소학교를 다녀야 하는 처지에 책을 읽고 싶어도 도저히 짬이 나질 않는 시절이었다. 군산에서 곡물과 소금을 취급하던 대상인 부친께서는 외지로 돌다가 두서너 달만에 귀가하여 그래도 장남이라고 공부 못하는 것은 용서치 않고 매를 들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부산이란 땅에 살고 있을 생모를 찾아 나서기까지는 더 많은 울음과 이 악물음을 거쳐야 했다.
서부경남의 곡물과 목재, 채취한 피마자 유등 군수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부산항까지의 수송에 애를 먹던 낙동강 하구에 드디어 조선땅에서 가장 긴 1km의 구포다리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즈음의 부산 쪽 낙동강 포구인 구포역전은 수많은 인부와 상인들로 붐벼 삼랑진만큼은 못해도  경부선상의 가장 활발한 신도시로 성장하고 있었고, 생모가 공사판 국수장사로 키워주는 덕에 어렵사리 2년 만에 대구사범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나 한 방에서 기숙한 조선인 선배가 훗날 이 나라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버들재에서

11월 27일_일_07:50     

 네 시간 여만에 어둠 속을 걸어 고남산 구간을 마치고, 매요 마을 포장길에서 멍멍이 짖음을 만날 때는 환히 밝은 아침 마을의 굴뚝 연기가 가을걷이를 끝낸 한가로운 농촌 마을의 풍요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마을 뒷산을 내려와 앞 마을 매요 회관 노인정에 배낭을 내려놓으니, 깨끗한 회관 길 옆에 아직도 남은 옛날 회관이 초라하게 간판을 이고 있다. 여러 산행객 들을 보살펴주던 할머니 가게집도 언제부터인가 문을 닫은 채 정겨움을 잃었고, 대신 아침식사 후 버들재로 향하던 중 마을 어귀 운성 학교 뒷켠에 깨끗한 신식 휴게실에 젊은 시골 마담 같은 여주인이 장작불을 피우며 막걸리를 권한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서 산중 식사와 달리 여러 팀으로 흩어져 여유로운 조식 파티를 즐긴다. 지리산과 덕유산 종주를 사정상 먼저 끝내고 3차례의 지덕 연결 종주를 남겨둔 일행들은 이제 한 구간씩 뒤로 멀어져 가는 지리산 자락을 아쉬워하며, 걷히는 안갯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황산벌을 디카에 담고, 대간 구간 중 몇 안 되는 대간 마을을 기억 속에 간직하며 이슬이 잔을 부딪힌다. 그리 험하지 않은 고남산 구간을 어둠 속에서 두어 차례 되밟기를 한 탓으로 조금 일찍 배낭을 챙겨 새로 지은 회관 앞에서 기념촬영 후 남은 구간을 향해 발길을 서두른다. 

 마을 어귀에 새로 생긴 휴게실 주모께서 훗날 대간꾼들의 전설로 남길 바라며, 건배의 막걸리잔을 잠시 기울인 후, 폐교된 운성 초교 뒷담을 돌아 가산리 뒷산으로 오르는 버들재(유치 삼거리)까지 시멘트 포장 마을길을 걷는다. 경남 일대 작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전근을 다니시던 아버님의 손때 묻은 시골학교들은 이제 몇 년 전 묘소 단장 때 새로 마련한 작은 비석에 이름으로만 남았고, 한 글자마다 돈 계산하는 서각 석공료에 참 여러 학교 이름을 새겨야 하는 아픔을 느꼈다. 젊은 교장 선생님과 사모님은 그렇게 잦은 보따리를 꾸리며 객지에서 중고교를 다니는 네 형제의 학비 마련에 한숨을 지었을게다. 오늘 밤 나는, 지금의 내 모습보다 젊은 얼굴의 두 분을 사진으로 모실터이다.

억새 농원

11월 27일_일_09:50     

 매요 마을을 출발한 지 한 시간 여만에 88올림픽 도로에 끊어진 모래재(사치재)에 도달한다. 원래 계획은 우회하여 사치 마을을 거치는 88도로 지하통로를 고려했으나, 가산리 뒷산 618 m 작은 봉우리를 외면할 수 없어 결국 명당 묘소터가 줄지은 대간 마루금을 착실히 밟아 다소 위험하게 방치된 2차선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소실된 마루금에 동물 이동통로 만들듯이, 대간협회라도 결성하여 조금씩 무단횡단 벌금을 자진 납부한다면 대간 통로를 금세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사치재를 지나 88도로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697m 조망 안부까지는 수년 전 산불로 검게 그을린 채로, 서고 기대고 누운 비목들을 그대로 방치하여 계절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예전 같으면 상흔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깨끗이 잘라내고 새로운 수종으로 갈아치우는 식목사업이라도 벌여야 했겠지만,  요즘은 자연 그대로 방치하여 자생력으로 원상회복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런대로 설득력 있긴 하나, 긴 시간 지난 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멀리 시리봉을 향하며 작은 봉우리를 북으로 올려다보니 억새 농원으로 불리는 능선길이 보이면서 늦가을 갈색의 정취를 한결 북돋운다. 내년 대간길 마지막 무렵 미시령 고갯길에도 저리 작은 관목 사이로 억새의 진풍경이 춤을 추겠지. 

 다음 주 속초행 여행에서 잠시 맛볼 수 있을까? 봄의 화려함도, 여름의 풍성함도, 그리고 겨울의 시린 고요도 아름답지만, 이 만추의 능선길에서 마주하는 마른 잎들이 내는 바스락 거림과 갈색 바람을 실은 억새의 배경은 , 삶의 마지막을 이루어 가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완성된 작품으로 느껴진다.

시리봉 하산길

11월 27일_일_10:50     

 시리봉이 바라다 보이는 697m 고지 안부 묘지터에서 잠시 독도법을 익힌다. 군대 시절 별로 관심 없게 배운 독도법을 이제야 수험생처럼 열심히 익히고, 가슴에 달린 플라스틱 나침반이 군용의 그것보다 참 가볍고 간편하다고 느낀다. 무릇 배움이란 시험용이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을 위해서라고 가르치던 내 자식 교육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과연 나는 그렇게 공부해 왔던가', 우린 앞날의 또 많은 상황에서 실천으로 배우지 못한, 책에  적힌 도덕을, 입버릇처럼 자식들에게 가르치며, 함께 그제야 깨달아 가야 할 것인데. 그나마 자식 앞에서 착해지고, 실천하는 부모는 천만다행 일터. 부디 함께 쇠고랑 차서야 여늬 재벌들, 사회 지도자들, 하물며 대통령 각하들처럼. 

 내리막 길을 10 여분 밟아 내려 새맥이재를 통과하니 마주 보이는 시리봉 길이 구간 마지막 오름을 재촉하며 제법 가파름을 보이지만, 웬만한 된 오름에 익숙한 지라 제법 여유를 보이며 매요 마을 젊은 주모가 챙겨준 정든 막걸리로 기를 북돋운다. 작은 봉우리를 넘어 시리봉 정상으로 느껴지는 헬기장에 다다라서야 지도상의

시리봉(776.8m)은 남동 130도 0.5km 지점에 비켜 앉아 있음을 읽어낸다. (11:35) 기대했던 시리봉 정상의 멋진 모습은 볼 수 없었으나 대간길 후반 정상 정복을 마치고 가볍게 내려서는 발걸음이 제법 뒤를 돌아볼 만큼 여유롭고 모처럼 햇살이 간간이 비치며 디카 촬영에 내리막 진행이 느려진다. 

 평탄한 철쭉길을 얼굴 상할세라 조심스레 헤치며 30 여분 나아가니, 781m 봉에 다다라 남근처럼 생긴 입석을 마주하고 멋진 사진을 기대해 본다. 정상의 푸른 소나무와 어울리는 멋진 풍광이 가까이 가서 보니, 넓적한 바위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채 대간길 시야에서만 날씬한 남근처럼 우뚝 솟아 홀림을 행하고 있었다. 781 고지 안부에 서서 뒤돌아보는 인월면 성산리 요업 마을이 , 걷힌 안갯속에서 88도로 건너편으로 펼쳐지고, 운봉읍 황산 아래  피바위 부근에서 국창 박초월이 부르는 동편제 소리가 들려온다. 도자기 전쟁의 심수관 후예가 일본 땅에서 절규한다.

오리 오리쇼셔     (오늘이 오늘이소서)
일에 오리쇼셔     (매일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시고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새라난 식에 오리쇼셔  (날이 새거든 주야장상 오늘이소서)  
아막 성터

11월 27일_일_12:20     

 억새 멋진 길을 돌아드니 마주하는 아막 성터가 동네 뒷산 마냥 정겹다. 오른쪽으로 제비를 연상 짓는 연비봉이 소담스레 솟아 아영면 흥부마을을 이루고, 연실 (제비마을) 흥부네 텃밭에는 배고픈 허기재를 지나 연하 다리 아래에서 금싸라기 사금 채취로 복을 캐던 흥부 부부가 석상으로 길목에서 관광 안내원으로 취직했다. 

 이렇게 함양 땅과 남원 땅이 만나는 지리산 북쪽 자락은 작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웃처럼 전설을 쌓아가며 혼들 마저 함께 어울리는 시공을 초월한 우리 민족의 화합터로 자리하고 있다. 신라-백제 장수가 경계를 밀고 당기며 싸우던 이 마당에서, 이성계는 함께 뭉쳐 왜구를 물리치고, 동학의 힘찬 민중이 마지막 항거로 쓰러져 누운 산자락 아막골 산성터에서, 인간이 만든 이념을 종교 삼아 쓰러지던 농민 출신 지역 빨치산의 여한이 담긴 성터 너덜 돌을 조심스레 밟아 내린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19살의 K노인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기장군 광산 국민학교에서 2년여 교사 생활을 하며 일본인 광산 관리 소장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으로의 유학을 꿈꾸던 중, 1940년 마침내 관부 연락선을  타고 동경으로 향할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어차피 사범학교로의 진학이 무슨 교육가로서의 큰 꿈도 아니었고, 가난한 조선인 수재들이 군 징집을 면하고 안정된 직장인으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그런대로 선비로서의 도덕적 신분을 유지하며, 일본화 정책에도 어긋나지 않는 엘리트 집단으로 여겨지던 교사로서의 지위가, 막상 현직에서 느끼는 젊은 조선인 교사의 민족적 한계로 엉켜져 다가올 때는 견디기 힘든 지식인의 고뇌만 쌓아갈 뿐이었다.  
 동경에서의 유학생활은 K노인에게 있어, 일본인에 대한 치욕스러운 민족적 감정과 훗날 뒤돌아 보기 싫은 설움에 대한 회한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와 영어를 배우며 밥벌이를 위해 가정교사로 지낸 곳은 일본 정계에서도 제법 이름 있는 유명한 장군 집이었다. 노일전쟁의 공로로 받은 훈장을 가보처럼 자랑하는 명문가 가정교사로서 받는 대우는 우리의 상상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지식인으로서의 선비를 가장 상류로 받들던 조선 사회의 윤리와, 이미 개화의 물결 속에 섬들 상인의 관습으로 돈으로 지식을 사들일 수 있으며, 지식인을 고용할 수 있다는 일본식 사회에서, 가정교사란 한 집안의 하인으로서 온갖 잡일을 함께하며, 지식 전달의 잡일이 더 할 뿐이었다.   
 눈물과 설움에 익숙한 젊은 시절의 K노인은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유학시절을 마치고 조선인으로 드물게 일본 본토 정식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었고, 해방 직전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조선으로 돌아와 국책기업 일본 화약의 유일한 조선인 관리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K노인이 여늬 그 시절 지식인들처럼 무난히 해방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면 과거사 청산 위에서 이름을 날리는 영광을 안고, 청산되지 않은 지식인으로 오늘을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만추-복성이재

11월 27일_일_12:50     

 아막성터를 지나, 장수와 함양을 잇는 지방도가 새롭게 보이는 복성이재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늦은 가을의 정취를 맛보며 여유로운 산행을 즐긴다. 멀리 다음 구간에 내딛을 치재와 봉화산을 마주하며, 긴 시간 20km를 걸은 아마추어 답지 않게 내친김에 몇 봉우리 더 넘고 싶을 정도로 여유로보다. 길섶을 이루는 낙엽 더미 속에서 유난히 붉은 갈참나무 떡잎을 마주하며 마지막까지 잃지 않는 자연의 생명과 남기고 싶은 진혼을 느낀다. 

 어울리지 않는 쇠사슬 대문을 세워 놓은 복성이 뒷재를 지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징소리에 혼을 부르는 굿쟁이 당골네 백단이가 춤을 추며 구간 마지막 작은 마루금을 밟아 내리니, 찻길 뜸한 신작로 복성이재에 장수군 변암면 돌표지가 제법 차가워지는 서북 바람을 막아주며, 젖은 땀을 입은 채 김치찌개를 벗 삼아 하산주를 나눈다.

 함양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모친 제사를 지내고 내일 상경할 탓으로 당기는 이슬이를 애써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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