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사라진 자리에 살이 되어 자라는 것들에 대하여
가장 많은 말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세상은 더 많은 증명과 더 화려한 언어를 요구했지만, 너는 한 줌의 숨을 탁자 아래로 조용히 밀어두었다.
입술을 달구던 문장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네 안으로 침잠했고,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너의 진짜 언어를 보았다.
창가에 닿은 네 손끝에서 문장의 껍질이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여백을 따라 흐르는 미세한 호흡이 종이의 결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것은 말보다 먼저 도착한 마음이었고, 어떤 단어로도 치환할 수 없는 투명한 진술이었다.
뼈의 틈으로 스며드는 무거운 언어
네가 뱉지 못한 숨은 네 피부 아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관절의 골편과 뼈의 틈을 따라 흘러 들어와, 형체 없는 진술로 굳어갔다.
비 내리던 오후, 젖은 공기 속에서 너의 단어들은 이름 없는 물방울로 흩어졌다.
귓가를 타고 흐르던 말들은 내 어깨에 내려앉아 의미가 아닌 '무게'로 남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해하려면 말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비워둔 의자 위에 남겨진 묵묵한 체온을 보며 깨달았다.
빠져나간 말의 틈에는 말보다 훨씬 더 오래 남는 침묵이 흐른다는 것을.
손끝과 옷깃, 그리고 등줄기를 타고 아무 말 없이 번져간 너의 기척은 그늘처럼 나를 덮었다.
그 고요한 덮임 속에서 내가 붙들고 있던 기억과 이유들은 한 겹씩 무기력하게 벗겨졌다.
귀가 아닌 혈관으로 너를 듣는 일
어느 순간, 너의 침묵은 내 목젖 아래까지 밀려왔다.
나는 그 거대한 고요 밑에서 작은 균열처럼 금이 갔다.
네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건넨 그 무거운 진실들이 내 안의 견고한 벽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그날 밤, 방 안의 불은 꺼졌지만 실내는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너는 그림자가 되어 사라지는 대신,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내 눈동자의 가장자리로 배어 들어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귀로 너를 듣지 않는다.
나는 나의 혈관과 관절로 너를 듣는다.
맥박이 뛸 때마다 네가 삼켰던 단어들이 내 몸 안에서 공명하고, 마디마디 쑤시는 통증으로 네가 견뎠을 침묵의 무게를 가늠한다.
살이 되어 자라는 침묵
말이 사라진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침묵은 그곳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살이 되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은 소통의 실패가 아니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껍질을 벗어던지고, 서로의 존재 자체가 서로의 살과 피가 되는 지극히 고요한 연합이다.
너의 침묵은 내 안에서 하나의 생명이 되어, 오늘도 나를 숨 쉬게 한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은 결국 우리의 몸에 새겨진다.
나는 오늘도 네가 비워둔 여백을 읽으며, 네가 흘린 침묵의 조각들을 내 몸 깊숙이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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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침묵을 듣고 있다〉
―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하여
가장 많은 말이 쏟아지던 날,
너는 한 줌의 숨을
탁자 아래 조용히 밀어두었다.
창가에 닿은 손끝에서
문장의 껍질이 천천히 벌어지고,
여백을 따라 미세한 호흡이
종이의 결을 거슬러
말보다 먼저, 마음을 건넸다.
숨은 피부 아래 머무르지 못한 채
관절의 골편과 뼈의 틈을 따라
형체 없는 진술로 굳어갔다.
비 내리던 오후,
젖은 공기 속 단어들은
이름 없는 물방울로 흩어졌고
귓가를 타고 흐르던 말은
어깨를 접으며
무게만을 남겼다.
빈 의자 위엔
묵묵한 체온 하나가 남아 있었고,
빠져나간 말의 틈엔
더 오래 남는 침묵이 흘렀다.
손끝, 옷깃, 등줄기,
아무 말 없이 번져간 기척은
그늘처럼 나를 덮었고
기억과 이유는 한 겹씩 벗겨졌다.
어느 순간,
너의 침묵이
내 목젖 아래까지 밀려왔고
나는 그 밑에서
작은 균열처럼 금이 갔다.
그날 밤,
불은 꺼졌지만
방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너는 그림자가 되지 못한 채
느리게,
내 눈동자의 가장자리로 배어왔다.
이제 나는
귀가 아닌 혈관과 관절로
너를 듣는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은 천천히,
살이 되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