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에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
총성이 멎은 들판은 이토록 평온하다.
뜨거운 금속이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자리, 억눌린 숨은 차가운 흙먼지 속으로 서서히 잠긴다.
누군가 치켜들었던 깃발의 색깔도, 적군과 아군을 가르던 명분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헝클어진 손가락 사이로 피가 빠져나가는 만큼, 나를 가두고 있던 세상의 소음들도 멀어져 간다.
죽음은 모든 대답이 사라진 자리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정직한 질문이다.
눈앞의 풍경은 색을 잃고, 초점 없는 시선은 바닥으로 흩어진다.
흙 위에 스며든 핏자국은 굳어가는 땅의 결을 따라 깊은 주름처럼 남는다.
머리는 멍해지는데, 기이하게도 내 몸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어깨를 스치던 바람의 차가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뱉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그 모든 것이 살갗에 새겨진 기억이 되어 되살아난다.
나를 지탱하던 생각들은 이제 단단한 나무처럼 버티지 못한다.
내 의식은 스스로 터져버린 핏줄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총알이 지나가며 만든 그 텅 빈 구멍. 그곳엔 이름도, 계급도, 나를 증명하던 그 어떤 단어도 담기지 않는다.
그저 깊고 고요한 어둠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시간을 감아내며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손끝을 빠져나가는 생의 마지막 감촉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우리는 평생 대답을 찾기 위해 살아간다.
성공하기 위해, 이기기 위해, 증명하기 위해.
하지만 죽음은 삶의 가장 끝자락에 와서야 우리에게 진짜 질문을 던진다.
내 몸의 마지막 떨림이 잦아들 때, 세상이 내놓았던 그 수많은 정답은 쓰러진 내 육체 곁을 허망하게 맴돌 뿐이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 짧은 틈새로, 내가 한 번도 쥐어보지 못한 맑은 빛이 스며든다.
그 빛은 비명을 삼킨 채 흙 속으로 잦아들고, 세상에 묻히지 못한 나의 진짜 이름 하나가 몸이라는 감옥을 벗어나 느리게 고개를 든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내 생애 가장 진실한 질문이 시작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침묵의 틈에서 태어난, 내 영혼이 쓰는 첫 번째 문장이다.
세상의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 남겨진 마지막 떨림 하나.
그것은 이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내 심장 안쪽에 박힌다.
모든 것이 무너진 구멍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나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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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늦게 도착한 질문⟫
총성이 멎은 들판,
숨은 흙먼지 아래 감긴다.
기울어진 깃발 대신
헝클어진 손가락 위로
침묵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잃는다.
무채색 풍경,
깨진 시선이 흘러내리고
핏빛 잔흔은
굳은 흙결 따라
주름처럼 접힌다.
살이 기억한다.
어깨뼈 스친 바람,
목구멍에 걸린
반쯤 삼킨 목소리.
매캐한 흐름 속,
생각은
나뭇껍질이 아니라
스스로 갈라진
핏줄처럼 흩어진다.
총알이 지나간 공간,
무게 잃은 몸은
어둠을 더듬는다.
그 구멍엔
이름도,
부를 말도 없다.
살아 있음은
시간을 되감는 일이 아닌,
가라앉은 생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는 일.
그러나
그 결은
끝내 붙잡히지 않는다.
죽음은
가장 늦게 도착한 질문.
몸 어딘가
떨림으로 남고,
모든 대답은
쓰러진 자리를
맴돌 뿐이다.
울음도 되지 못한 틈,
그 여백만이
쥘 수 없는,
그러나 스며드는 빛을
조용히 품는다.
빛은
말을 삼킨 채
흙 속에 스며들고,
묻히지 못한 이름 하나가
몸 벗어난 자리에서
느리게 고개를 든다.
그곳에서,
질문이 시작된다.
죽음은
질문의 끝이 아니라
끝을 되묻는
침묵의 틈에서 태어난
첫 문장.
말이 닿지 못한 곳에
남은 떨림 하나.
심장 안쪽에
지워지지 않는
작은 문장으로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