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빛의 반대편에서 빛나는 것들

빛과 그늘 사이에 남겨둔 말들

by Don Shin

끝에 가까워질수록

처음이 자주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이곳까지 흘러왔다.


어떤 문장은 오래전의 저녁에서 왔고,

어떤 문장은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쓰는 동안 알게 된 것은

기억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말로 남지 못한 순간들은

침묵으로 스며 있었고,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빛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글들은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 쓰였다기보다

이미 희미하게 빛나고 있던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기 위해 쓰였는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빛이 닿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날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들.


그러나 돌아보면

삶은 늘 그런 날들 위에 쌓여 있었다.


빛은 강한 곳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것 같은 자리에서도

가만히 남아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조금씩 빛나는 법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이 연재를 통해 남긴 것은

완성된 이야기라기보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에 가까울 것이다.


문장들은 끝났지만

그 문장들이 지나간 자리는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끝이라기보다

잠시 멈추어 서 있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다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모이고

말이 되지 못한 시간들이 쌓이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조용히 시작될 것이다.


빛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하니까.


그리고 그때에도

우리는 아마


빛과 그늘 사이 어딘가를

다시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를 쓰는 동안 한 편의 시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이미 네 번째 글에 실렸던 〈너의 언어가 지나간 자리〉입니다.

돌아보니 이 연재의 많은 문장들이 어쩌면 이 시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 애쓰던 시간들,

닿지 않는 말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들.


그래서 마지막에 이 시를 다시 놓아 둡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의 언어가 지나간 자리〉


이곳, 시간은 무겁게 눕는다.

숨처럼 스며드는 말,

어깨를 짓누른다.


빛이 창을 스치면

잔상은 꺼지지 않고,

공기의 결을 더듬으며

흐름의 속도를 짐작한다.


너의 언어는

흐린 빛 속에서 퍼져나간다.

나는 그 감정을 껴안고,

몸에 남은 빈틈을 헤아린다.


내 작은 말 하나,

네게 닿기도 전에

그 그림자를 먼저 그려본다.


너의 세계는 다르다.

시간은 옆으로 흐르고,

그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뿐.

단어는 파편처럼 흩어지고,

손끝은 공기를 베며

얼굴은 얼굴을 지나친다.


너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흔적이 남아도 고통은 없다며,

치유의 속도만을 좇는다.


나는 너의 말 끝에 발을 디뎠고,

균열 난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벽이 울렸다.

무너졌는지, 세워졌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너는 나를 지나치고,

나는 너를 따라 흐른다.

너의 시선의 틈에서

겨우 나를 바라본다.


너는 먼지처럼,

바람처럼 스쳐간다.


너의 말이 내게 닿지만

뜻을 잃은 기호처럼 흩어진다.

나는 그 조각을 주워 품는다.

손끝에서 기워진 문장들,

너의 얼굴을 짐작한다.


흩어진 말로 하루를 견디고,

혼자서 연습한다.


너의 세계를 걷는 동안

등 뒤에서 물결처럼 밀려온다.

“왜 멈춰 있니?”


나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데,

너는 평지를 달리고 있는데,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는다.

너의 언어가,

내게도 진실이기를.


허공에 떠도는 말들이

구름처럼 몸을 감싼다.

그 안에서,

나는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몸을 찌른

말의 파편을 쥐고,

침묵에 깃든다.


소리의 자국 없는 막.

손끝이 미끄러지는 투명한 경계.

너는 벽을 세우고,

나는 그 안에서

간격의 흔적을 수집한다.


“왜 이것밖에 이해하지 못하니?”


벽 너머, 너는 반복한다.

나는 언젠가 대답할 수 있을까.


기다린다.

어둠이 내려앉고,

경계는 흐려질 때까지.

내 말이 너에게 닿을 수 있다면,

너의 말이 나를 향할 때까지.


너머에서

다시 나를 부르는

돌처럼 식지도,

구름처럼 흩어지지도 않는

너의 목소리.


나는 그것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다.


발끝에서

무언가 흩어진다.

벽인지,

내가 흘린 말인지 모른 채.


부서진 침묵 너머,

물방울 속에 잠긴 달처럼

흔들리며,


말의 껍질이

벗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