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차 문화기획자의 폐업일기 00. / 2024.01.24.
장장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 데이터를 저기에 옮기고, 겹치는 자료는 지우고, 때로는 멈춰 서서 그때 그 아이들의 자료정리 방식을 탓하고, 짜증 내고, 누군가의 자료 정리 방식에는 지난 일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사용자 없는 노트북 두 개를 더 가져와 옮기며, 또 옮기고... 그 와중에 구글드라이브 저장용량도 빨간불이 들어와 처치 강령을 공지하고 손수 다운로드하여 옮기고 지우며, 한 달을 보냈다.
신줏단지 모시듯 20여 개의 외장하드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해 가며, 7~8개의 외장하드는 폐기하고, 15여 개의 외장하드를 살려내 라벨작업까지 마쳤다.
2002년부터 자료가 있어야 마땅하고, 어딘가에 그것들이 있겠지만 공식적으로는 2005년부터 2023년까지 안알랴줌의 거의 모든 사업과 운영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볼 수는(?!) 있게 정리했다. 왜 한 번도 이런 작업을 안 했지? 못했지? 주어 없는 원망을 하긴 했으나, 사실은 이 작업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지루한 과정 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으니,
누가 본다고 이 정리를. 이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여기에 이렇게 시간을 쓰고 있나.
마치 두꺼운 페어 디렉터리북을 한 글자 한 글자 교정하고 윤문 하는 과정에서 받았던 현타, 모 기관의 빼곡한 성과전시 텍스트를 바라보며 했던 헛웃음, 누가 본다고.
어쨌든 시작한 것이 아쉬워 마무리를 하긴 했고, 라벨작업까지 하고 나니 기분은 개운했다. 문득 이 정보 모두를 판다면 나는 얼마에 팔 수 있을까? 10억? 7억? 5억?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확실히 5억은 너무 적다고 혼자 결론을 내려보았다.
길었던 망설임과 혼란스러웠던 결정의 시간들 속에서 21년 차 조직인 우리는 일단 멈춤을 가장한 폐업, 곧 해산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과정으로 자료정리를 했다.
나 스스로 답하기엔 다소 어렵고 명확하지 않지만, 만약 누군가 인터뷰하겠다고 와서 공식적으로 왜 자료정리를 하냐 물으신다면 아마 또 이렇게 술술 잘도 대답할 것이다.
" 폐업을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저에게 이곳은 첫 직장이자 제 젊은 시절 그 자체인데, 그 문을 닫고 멈춘다는 것은 마치 그 시절의 나를 정리한다는 느낌일까요? 그래서 정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그냥 한 번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정리를 하면서 내가 일해온 시간들, 사람들, 가치들, 성과들을 정리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본격적인 정리를 하기 앞서 꼭 해야 했던 일 같아요.
다른 무엇도 아닌 저 자신을 위해서 말이죠. 나의 시간, 나의 일들을 인정하고 스스로 인정하고 칭찬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