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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르릉 Nov 14. 2024

비전을 졸업한다고?

20년 차 문화기획자의 폐업일기 02.  / 2024.04.15.



이번일로 비전을 졸업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는 10여 년간의 힘든 길에서의 피로함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평온하고 오롯한 에너지에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이제 막 우리의 마무리를 결정했고, 결말을 결정짓고, 시나리오를 만들고, 일종의 탈출과 해방을 꿈꾸고 있는 나에게 충격적이었달까.


비전을 졸업하는 게 가능한가. 대한민국에서, 그 어려운 의제로, 이런 시국에?


저는 비전을 자퇴하는데요, 퇴학당한 거 같은데요.라고 웃어넘겼지만, 내심 모른 채 하고 내버려 두었던 나의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며 가고 있었나, 나는 사회적 기업이자 비영리 법인의 리더로 부끄러움이 없이 최선을 다해 왔을까.

하지만 그와 내가 같을 수 없는 것. 그의 역할이 있다면 나의 역할이 있었고, 그 조직의 방향과 우리 조직의 방향은 다를 수도 있는 것.


어떻게 이 일을 해야 할까, 어떻게 이 일을 해 내야 할까.


잠시 연락이 없던 그 사이, 오히려 안심했다. 그래… 더 잘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고, 돕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는 나중에 뭐 잠깐 도우면 되지 뭐.

우리 존재는 잠시 잊어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오늘.

꼭 참석해 달라는 해외파트너들과의 미팅에 흔쾌히 따라나서면서도 그저 돕는 자로 존재해야겠다는 마음만은 버리지 못했는데 그 회의 테이블에 앉는 순간 그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 잘 해내야지. 우리의 마지막을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하는 거야.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거야. 체계적으로 조직된 곳에서, 그럴듯한 직책을 맡고, 넉넉한 예산을 굴려가며 하는 일이 아니라도 괜찮아.

나와 우리의 커리어를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아. 아니 그런 생각조차 중요하지 않아.

그저 그 가운데 함께하는 것, 진심은 통하고, 우리의 미덕인 성실함과 책임감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킬 거야.'


20여 년간의 길고 유난했던 우리의 커리어를 마감하기에 이보다 좋은 이벤트가 있을까. 혼자가 아니고, 성과와 방향성은 일치하고, 폭력적인 클라이언트도, 집객의 압박도 없으며, 모두 선한 의도로 함께 모인 사람들이 누구 하나만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는 일.

혹은 그런 의도가 있더라도 촌스럽게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모두 동의하는 곳. 바로 그곳이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고, 드러나고 싶다는 욕망은 존재하지만, 그저 그 안에 존재하고 믿음의 주체가 된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를 믿고 나아가기로 했다.


사실 요즘 고통스럽다. 새로운 일은 쉽게 얻어지지 않고, 건물 매도도, 임대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크고 작은 몸과 마음의 문제가 있고,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아주 힘든 인생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으며, 내 사랑하는 아들은 나의 관심과 돌봄을 더욱더 필요로 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 갚아야 할 돈, 정리해야 할 일들이 계속 눈앞에 있어, 이제는 쉬고 싶다, 혼자 있고 싶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과잉된 에고에서 오버 싱킹으로 주제를 옮겨 읽고 생각한다.


결국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아침을 조금 늦게 시작해 커피를 마시며 쿨타임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새로 생긴 세 군데의 카페가 모두 훌륭한 드립커피를 만들고, 친절하고 아름답고, 일찍 문을 연다. 그리고 나는 자유롭게 시간과 장소를 쓰며 일을 할 수 있다.

오랜 고생 끝에 나와 조직의 커리어는 신뢰감을 받고 있으며, 좋은 친구들이 꽤 있어 나와 우리의 행복과 안위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격려해 준다.


나의 열두 살 아들은 전두엽의 문제로 그야말로 질풍노도지만, 방과 후 선생님들께 너무 예쁘고 착하고 특별한 아이이며, 지금 건강하다. 잘 생겼다, 귀엽다. 심성이 곱다. 그리고 참을 만한 질풍노도이다.


이렇듯 고통보다 감사함이 더욱 많다.


그러므로 이렇게 오랫동안 미뤄온 쓰기를 시작한다. 이미 시작된 새해, 이미 예정된 결말. 이미 진행되는 일들, 이미 지나간 갈등과 극적인 순간들.


아무래도 좋다.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진실하게, 정성을 다해. 그렇게 하면 된다.


사실, 난 늘 그래왔다.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다.


자책하지 말 것, 반추하지 말 것, 좌절하지 말 것.


어쩌면 나는 매우 감동적이고 매우 소셜 한 비전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나와 우리라는 비전을 졸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몇 개월 후 이 일은 나에게 어마무시한 시련을 안겨주게 된다. 마치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처럼 불시에 모든 것을 뒤집어버린 사건이었다.

이렇듯 인생이 참 다사다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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