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차 문화기획자의 폐업일기 03. / 2024. 05.04.
혼자 있는 사무실이 참 좋다.
고요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온전한 나의 시간과 장소.
곧 나의 사무실이 주는 안온함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이 시간이 애틋하다.
물론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지지 않았지만,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오고, 나는 조금 여유를 부리거나 실무에서 떨어져 있어도 큰 문제가 없다.
내 사무실이 있는 것, 내가 리더인 사무실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위기와 이슈에 대응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감과 불안감, 사무실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세세한 것들(구성원들의 관계, 그들의 건강, 사무실의 컨디션과 위생, 기타 등등)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이 감사하다.
안알랴줌의 시작을 2002년으로 한다면 2009년쯤 조직화가 제대로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안알랴줌 시장을 주요 사업으로 가끔의 외부기획사업이 있었고, 사무실 인원은 3명을 넘지 않았다. 1년의 예산을 사무실에서 어떻게 굴렸는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을 지속했는지 사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2009년 설립자이자 대표인 김노노 씨가 말했다.
“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 월급을 받고 일할 수만은 없다. 우리도 그것을 해보자. 사회적 일자리 사업. ”
사회적 기업 인증등의 준비를 하며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 사회적 목적 실현
- 비전과 미션
- 세무
- 회계
- (기획위원, 자문위원이 아닌) 이사회
- 사업자등록증
- 4대 보험
- (지원금이 아닌) 계약과 정산
기타 등등.
나는 꾸준히 사회적 기업을 원하지 않았다, 조직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즈니스 마인드라는 것은 우리 DNA에 없기 때문에 맞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정책사업에 우리를 맞춰왔다, 며 자조했지만,
사실 우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넘으며 일을 하는 사람들, 일이 되게 하는 조직과 사무실을 만들어 왔다.
우리의 일이 왜 홍대 앞 놀이터 안에만 머물지 않고 확산해야 하는지 새롭고 확장된 언어로 만들면서,
돈을 얼마나 벌고 얼마나 썼는지 낯선 언어와 형식으로 정리해 가면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채용을 통해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방식을 배우면서,
계약금을 받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일을 해주면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된 것이다.
일 잘하고, 멤버십 좋고, 유쾌한 사람들이 있는 회사 "안알랴줌“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사건과 갈등, 고난과 고초들이 있었고, 지우기 어려운 흉터도 남겼고 반추하면 괴로운 순간도 많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고, 그리움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2020년 언저리에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김노노 씨가 말했다.
“ 조직과 함께 너희도 나이를 먹었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야 한다. ”
그 준비가 "폐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폐업"을 잠정적으로 결정했다.
2002년에 홍대후문 언저리에서 주워온 의자와 2009년에 쓰던 스테이플러, 2016년에 이사 오면서 마련한 사무용 책상과 의자, 2023년 새롭게 들인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는 나의 사무실.
모두가 북적북적, 한 명도 망설이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농담을 던지고, 박장대소를 하는 나의 사무실,
시간에 쫓기느라, 일에 집중하느라 숨 막히게 고요한 나의 사무실,
홀로 나와있는 고요한 나의 사무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 이 날, 이 순간에 감사한다.
드디어 폐업일기 다운 폐업일기를 써낸 것 같아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