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순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기록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은 아이였다. 그 기억력이라는 게 공부에 적용되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고, 일상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정말 화면 캡처하듯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편이라 지인들이 늘 신기하게 생각하고는 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6학년 2학기가 시작될 때 서울에서 지방의 도시로 (그것도 읍 소재지로) 전학을 갔던 날 있었던 일은 지금도 술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그날 있었던 일(마침 전교회장 선거가 있던 날이라 교실이 아니라 강당으로 바로 가야 했고, 후보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투표를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입고 있던 옷, 묶었던 머리 모양, 친구의 옷차림 등까지 세세하게 기억을 한다. 물론 지금은 많이 잊어서 예전만큼 생생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정말 캡처 버튼을 누른 것처럼 기억되어 있는 날 중 하나다.
특히 이 날이 더욱 생생한 것은 아마도 ‘처음’이라는 키워드가 있었기 때문일 거다. 전학도 처음이었고, 학교, 교실, 선생님, 친구들 모두 처음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해서 더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 위축된 마음에 모든 순간순간을 캡처해 저장해 두었던 것 같다.
나의 ‘생생한 캡처 기록들’을 떠올려보면 늘 처음의 순간을 마주하곤 한다. 처음 전학을 간 날, 처음 남자친구를 사귄 날, 처음 대학교 OT를 떠난 날, 처음 누군가와 싸우고 관계가 틀어진 날, 첫 출근한 날, 처음 지금의 신랑을 만날 날, 처음 출산을 한 날, 아기와 처음 문화센터 수업을 들은 날, 아기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간 날 등등 내 생활 속 첫 순간들이 고스란히 캡처되어 기억 속에 기록되어 있다. 한때는 이렇게까지 집착적으로 기억하는 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나의 수많은 고민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의 나를 잡아 두려고 하는 것 같았달까.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순간의 기록들을 잘 담아두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저 남들보다 잊고 싶지 않은 찰나의 순간이 많았던 거라고 생각하니 뭔가 풍만해진 느낌도 든다. 과거의 기억이 풍성하니 글로 적어낼 이야기들도 많아진다.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거나 새롭게 조합하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생겨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물론 예전만큼 세세한 조각들은 아니지만(심지어 출산 후에는 건망증까지 심해졌다. 출산할 때 뇌도 같이 낳는다는 말이 마냥 농담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의 과거 기억의 조각들이 느슨해지는 만큼 내 아이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이 새로 생겨나서 또다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아이가 커서는 스스로 기억도 못할 수많은 처음 순간들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순간들을 또 내 기억 속에 캡처하듯 기록해 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의 처음과 아이의 처음을, 그 기억의 조각들을 또 새롭게 이어서 만들어낼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그래서 서툴지만 천천히, 조각들을 꺼내어 이어 붙여서 글로 남겨보려 한다. 우리가 함께 한 처음의 순간들이 잊히지 않도록, 잘 정리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