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선 긋기

나보다 나은 너를 보는 기쁨

by 로하


아이가 직관적으로 그려 낸 그림을 보며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 우리 딸 천재인가? 어쩜 이걸 이렇게 그렸어?” 호들갑에 호들갑을 떨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준다. 아이는 이제 본인이 직접 표현하는 것에 부쩍 자신이 붙은 것 같다. 아직 7살 꼬맹이의 그림이 뭐 그리 대단하냐 할 수 있겠지만 그림에 소질이라고는 없는 내가 볼 땐 그 마저도 너무 대단한 것이다. "엄마도 이렇게 못 그리겠는데?" 라며 칭찬했던 그 말은 정말 진심이기도 했다. 나보고 지금 그걸 그리라고 해도 못 그릴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에는 영 흥미가 없었다. 미술은 뭔가 재미도 없고 하기도 싫었다. 어쩌면 내가 못하는 걸 깨닫고 난 후에 더욱 흥미가 떨어지면서 관심도 하락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는 운동장에 나가 ‘우리 학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 있었는데 원근감과 풍성한 색감으로 스케치북을 화려하게 수놓은 친구의 그림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와,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가 있지?’ 감탄했던 것 같다. 반면, 나의 그림은 그야말로 1차원의 평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앞에서 바라본 학교 건물을 그대로 선만 이어서 그려 놓았다. 그것도 시간 내에 마쳐야 해서 겨우 그린 그림이었는데. 사실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미술학원에 잠시 다니긴 했는데 내 그림 실력에 충격을 받아 내가 다니겠다고 했는지, 엄마가 한번 다녀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학원에 다니면서도 영 흥미를 못 느끼고 실력도 제 자리가 얼마 안 가 그만두었다.


최근 그림 그리기에 자신감이 붙은 딸아이는 잘 하건 못 하건 그림을 그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하얀 도화지에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엄마보다는 우리 딸이 훨씬 낫다 싶다. 잘못 그렸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좋다. 지우거나 새로운 종이에 다시 그리면 된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거침이 없다. 동그라미는 엄마가 그려주라던 꼬맹이는 없고, 본인이 쓱싹쓱싹, 밑그림부터 채색까지 일사천리다. 이렇게 또 한 번 아이의 성장을 느낀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발레리나가 될 거라던 아이가, 잠들기 전 함께 침대에 누운 나에게 발레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선언했다. 6개월 남짓 정말 즐겁게 다녔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니 살짝 당황하려던 찰나, 최근에 수업 시간에 턴 연습을 하다가 잘 되지 않자 눈물을 글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선생님께 전해 들었고, 아이는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상태라 따로 물어보지 않았었는데 대뜸 그만두겠다니…

“왜 갑자기 그만두고 싶어? 재미있어했잖아.”

“그냥. 발레랑 태권도랑 같이 다니니까 힘들어.”

“그럼 태권도 가는 스케줄을 조정하면 되지.”

“아니야 그냥 발레 그만하고 싶어.”

“음, 발레 수업에서 어려운 동작 배우고 있어서 그래? 아님 잘 못해서 선생님께 혼났어?”

“아니. 그냥 안 하고 싶어.”


끝까지 턴이 잘 안 되어서 하기 싫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꼬치꼬치 캐묻기도 애매하고,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보니 그 마음이 완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더 묻지는 못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다독였다. 사실 발레를 본격적으로, 오래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 그만두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내심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재미있게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쉬운 마음도 컸다. 하지만 본인이 하기에 어렵다고 느끼거나 다른 친구들에 비해 못한다고 생각되는 일은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려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속상했는데, 그 연장선에서 발레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니 답답하기도, 안쓰럽기도, 속상하기도 해서 잠든 아이의 곁에서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다음 날, 손잡고 어린이집에 가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발레학원 그만두고 싶어?”

“응.”

“알겠어. 엄마가 선생님께 얘기할게. 근데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처음에는 쉬워도 점점 어려워지는 거고, 처음은 당연히 못하는 거야. 계속해서 연습하고 그러면 실력이 늘어서 잘하게 되는 거야. 태권도도 지금은 처음 시작하는 거라 재미있지만, 점점 어려워질 텐데, 그럼 그때 또 그만둔다고 할 거야?”

“아니.”

“이제 해보지도 않고 그만두는 건 안돼~ 알겠지?”

“응.”


금방 포기해 버리는 아이를 보는 것은 조금 속상하다.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그런데 이것 역시도 아이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잘 못하는 것에는 흥미를 영 못 붙이고, 가끔은 쉽게 포기했었으니까. 처음에는 마냥 속상했는데, 아이의 행동도 나의 속상함의 이유도 이해가 되니 이제 아이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 동그라미 그리는 것도 어려웠지만 이제 이렇게 재미있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것처럼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저 선을 하나 그려보듯 시작해 보자고.


앞으로도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시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아이로 자라나길 원한다. 그림이든, 표현이든,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도전과 장벽들 앞에서 과감하게 작은 선을 그려 나갈 수 있길.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낙심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늘 응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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