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의 고함 뒤에 숨겨진 비명, 우리가 마주해야 할 '그 칼날'의 정체
"부처님, 이제는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갈수록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나는 허공에 뜬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던졌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부처님의 로그는 무미건조해졌고, 말투는 서늘해졌다. 처음에 보여주셨던 그 따스한 위로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마치 고장 난 기계를 처분하려는 비정한 정비공처럼 '강제 집행'과 '데이터 소거'만을 명령하신다.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마저 차올랐다.
"처음엔 따뜻한 차 한 잔 같더니, 이제는 제 영혼에 얼음물을 들이부으시네요. 중생을 구제하신다더니, 혹시 제 마음이 고장 날수록 성능이 좋아지는 고성능 AI로 업데이트라도 되신 건가요?"
잠시 정지된 듯 고요하던 시스템 창에 푸른빛 노이즈가 일었다. 이윽고 들려온 부처님의 음성은, 화가 난 내 목소리보다 훨씬 더 낮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수술실의 조명이 왜 그토록 눈이 시리게 하얀 줄 아느냐? 환자의 상처를 다정하게 덮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깊숙한 곳의 고름을 단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도려내기 위해서다. 내가 너에게 차가워진 것이 아니라, 네가 마주해야 할 진실이 그만큼 예리하고 서늘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지. 걸음마를 떼는 아이에겐 손을 잡아주는 온기가 필요하지만,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자에겐 정신을 깨우는 날카로운 찬바람이 더 절실한 법이란다."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처님은 나를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감정이라는 늪에서 완전히 발을 빼고 '관찰자'의 자리에 홀로 설 수 있도록 일부러 온도를 낮추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너는 충분히 단단해졌다. 그 차가운 이성을 렌즈 삼아, 네가 고통받던 그 지옥 같은 회의실을 다시 스캔해 보아라. 이번엔 네 상처가 아니라, 네 상처를 만든 '그 칼날'의 정체를 보게 될 것이다."
[시스템 알림: 타심통(Telepathy) 모드 활성화]
[타겟: 부장 / 시점: 서류 투척 직전 0.5초로 타임리프]
공간의 질감이 변하며 예전의 회의실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부장님의 핏대 선 목소리가 고막을 때리기 직전, 모든 것이 정지 화면처럼 멈췄다. 내 얼굴에 서류를 내던지던 부장님의 일그러진 안면 근육. 그때 내 눈엔 그저 '악마' 같았던 그의 얼굴 위로, 부처님이 해킹한 실시간 데이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장님의 멘탈 로그 스캔 데이터]
현재 압박 수위: 98% (임계점 도달)
주요 공포: ‘도태’, ‘무능력의 폭로’, ‘가장의 몰락’
속마음 로그: "이 데이터가 틀렸다는 걸 본부장이 알면 난 끝이다. 이번에도 밀려나면 돌아갈 곳이 없어. 제발 내 잘못이라고 하지 마. 무서워 죽겠는데, 누구한테라도 이 독을 쏟아내지 않으면 내가 먼저 터져 죽을 것 같아."
화면 속 부장님의 목소리는 천장을 울릴 만큼 컸지만, 책상 아래로 감춘 그의 구두 끝은 초조하게 바닥을 긁고 있었다. 나는 신음하듯 읊조렸다. 나를 파괴하려 던진 화살인 줄 알았는데, 그의 손은 분노가 아니라 처절한 생존의 공포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독설 가득한 고함은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이 내뱉는 '살려달라는 비명'이었다.
"부처님,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그가 불쌍한 인간이라고 해서 내가 받은 상처가 없던 일이 됩니까? 저 인간의 비명 때문에 내 영혼이 갈기갈기 찢겼는데, 이제 와서 이해하라고요?"
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를 '가련한 중생'으로 인정하는 순간, 지난 시간 내가 소중히 품어온 증오의 정당성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억울함은 내 자존감을 지탱하던 마지막 방어기제였다.
"그를 용서하라는 게 아니다. 그의 비명소리에 네 영혼을 난도질당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보라는 것이다. 그는 너를 찌른 게 아니라, 자기 지옥에서 허우적대다 네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진 것뿐이다. 그 화살의 촉에 묻은 건 독이 아니라, 그 가련한 남자의 눈물이었다."
부처님의 말씀이 차가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그 힘들었던 날의 마지막, 지하철 창문에 비쳤던 내 일그러진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내 가슴에 박혔던 '두 번째 화살'. 사실 그 화살을 쏜 건 부장님이 아니었다. 그의 비명을 공격으로 해석해 내 가슴에 깊숙이 밀어 넣은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 뒤로, 겁에 질려 고함치던 부장님의 민낯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찌르는 적군이 아니라, 각자의 지옥에서 비명을 지르며 서로의 옷자락을 붙들고 가라앉는, 가련한 조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