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공항 지점장에서 인천화물지점 로드마스터 ( 항공화물 탑재관리사 ) 로 직책이 바뀐 지 4주가 흘러갔다. 한동안 조직장으로서 주로 관리 업무를 해오다가 오랜만에 실무를 할려니 시쳇말로 죽을 맛이다. 게다가 근무 지역이 바닷바람이 세찬 영종도이고 겨울철이라서 소싯적 군대의 혹한기 훈련을 하는 것 같다.
항공기의 출발 시간에 맞춰 오전 근무자는 6시 이전까지 출근한다. 전날 11시경까지 오후 근무를 한 사람이 다음날 오전 근무에 투입되기 때문에 집이 먼 직원들은 지점에 마련된 숙소에서 잠을 잔다. 2년 전 나 역시 지점 숙소에서 잤지만 지금은 출퇴근을 한다. 잠자는 시간은 줄었지만 퇴근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 숙련도에 따라 직원들에게 배정되는 항공기와 노선이 다르다. 신참자는 주로 여객기, 숙련자는 화물기를 맡는다. 화물기 노선 중에서 미주 노선은 이원 구간이 많고 통관이 까다롭기 때문에 숙련된 선참이 한다. 군대로 치면 선임 병장이 하는 셈이다. 평상시에는 설릉설릉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위급한 순간에는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의 진가를 곧잘 발휘한다.
수출화물파트의 로드마스터 사무실은 화물을 용기 ( 항공기 탑재용 컨테이너 또는 팔레트 ) 에 적재하고 네트를 치는 창고 ( Warehouse ) 와 붙어 있다. 사무실과 창고 사이가 통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업 현장을 볼 수 있다. 로드마스터가 탑재 플래닝을 짜는 대로 창고에서 협력사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항공기에 탑재한다. 사무실과 창고.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미묘한 기운이 흐른다.
창고는 대략 축구장 6개 정도의 크기다. 고척 돔 야구장처럼 층고가 매우 높다. 창고에서 작업된 화물을 항공기까지 수시로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널찍한 출입문들이 늘 개방되어 있다. 한마디로 여름에는 찜통, 지금처럼 겨울에는 석빙고처럼 매우 춥다. 사무실과 창고 사이의 통유리를 통해 가끔 서로 눈빛이 마주칠 때는 불꽃이 튄다. 사파리와 야생의 차이 같은.
로드 마스터는 작업 현장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수시로 창고로 들어간다. 위험물, 생동물 등 특수화물이 규정대로 잘 적재되는지 확인한다. 이때 업무가 서투른 신참 로드 마스터들은 협력사 직원들의 좋은 타깃이 된다. 특히 사무직으로만 일해 온 신참이라면 현장의 긴급한 분위기에 압도되기 마련이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협력사 직원들이 굉장히 위압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견뎌내지 못한 많은 신참 로드마스터들이 수출화물파트를 떠났다. 나는 지금 그 한가운데 서 있다.
현장 협력사 직원과 로드마스터들은 주로 워키토키로 소통한다. 작업 책임자를 검수라고 하는데, 워키토키로 나를 찾는다.
'222 ( 뉴욕행 여객기 ) 로드마스터님! VAL ( 귀중품 ) 작업했으니 SEAL ( 귀중품에 부착 ) 가지고 확인하세요.'
신참자들은 검수가 워키토키로 찾기만 해도 심장이 뛴다. 어떤 지적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방심하면 안 된다. 애써 태연한 척 노련하게 응수해야 한다. 심호흡을 천천히 한번 한 뒤 최대한 저음으로,
'카피!'
창고로 들어갔다. 회사에서 지급한 방한복을 입었지만 몹시 춥다. 지게차가 빵빵거리며 분주히 화물을 용기에 적재하고 한쪽에선 안전모를 쓴 네트 조가 용기에 적재된 화물에 박자를 맞춰 네트 ( 적재된 화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그물 ) 를 던지고 있다. 네트 모퉁이에는 쇠뭉치가 달려 있어서 머리에 맞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아주 가끔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주위를 못 살펴 쇠뭉치에 맞는 로드마스터가 발생하고 지게차에 발등을 밟혀 목발을 짚는 경우가 있다. 치열한 전쟁 영화 장면에서 부상병을 대하듯 숙연해진다. 야생의 위엄.
입술이 시퍼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년 전 일할 때 안면이 있는 검수였다. 나이도 나와 비슷하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추운데 고생 많다고 먼저 덕담을 건넸다. 성실하고 일 잘하는 한 후배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몸으로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협력사 직원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마음 가짐을 달리하면 대부분의 일들은 그냥 흘러간다.'
후배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사진 by 해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