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집에 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고 대학 다닐 때는 자취를 했다. 딸아이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로 방안에 모처럼 생기가 돈다. 아내와 딸아이는 전화와 문자로 자주 연락하는데도 서로 할 말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몇 년 만에 단발머리를 한 엄마에게 딸아이는 연신 젊어 보인다고 칭찬을 한다. 아내의 얼굴이 하얀 목련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아내는 우리 세 식구가 관람할 연극표를 스케줄 근무를 하는 남편 일정과 딸아이의 스케줄을 조율해서 예매했다. 주로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봤었는데 이번엔 마곡에 있는 엘지아트센터였다. 공연명은 '러브레터'.
인기 있는 중견 배우 ( 정보석, 하희라, 박혁권, 유선 )가 남녀 두 명씩 짝을 이뤄 공연하는데 아내는 박혁권과 유선 조합을 택했다. 아마도 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원더풀 월드'에 박혁권 배우가 출연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달걀 장조림, 갈치구이 반찬으로 아침을 먹고 우리는 마곡으로 출발했다. 성인이 된 딸아이를 늘 그래왔듯이 우리 부부 좌석 사이에 앉혔다. 잠시 후 관람석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연극 무대에 조명이 집중되었다. 딸아이가 들고 온 연극 팸플릿을 미리 훑어본 덕에 줄거리를 대충 알 수 있었고 남자 주인공 앤디가 책과 글을 사랑한다는 점이 나와 비슷해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편 여자 주인공 멜리사는 글보다는 그림을 사랑하고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영혼. 50년에 걸쳐 주고받은 두 사람의 러브레터를 배우들은 감정을 이입해 연기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느낌이었다. 얼마 전 김상운 저자의 '왓칭'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 현실은 내 마음의 공간에서 상영되는 영화라는 관찰자 시점으로 연극을 관람했다. 내 육신을 둘러싼 감정과 생각을 무한한 마음 저편 속으로 놓아주면서 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이 이따금씩 올라오면 그저 들여다보기를 했다. 그럼 천천히 사라진다.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이제 알 듯하다. 수시로 피어나는 감정과 생각을 나 자신으로 착각하고 살아왔다. 감정과 생각을 비워 진짜 나인 무한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오늘은 우리 세 식구 딸아이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 애기봉을 가 볼 생각이다. 한 달 전 즈음 망원경으로 봤던 조강 건너편의 북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사진 by 해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