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시간

사색

by 마음을 쓰다

지방근무 발령 통보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안도도 두려움도 아닌 막연한 호기심이었다. 결혼 후 이십여 년 동안 아내와 한 집에서 살았고, 그 사이 아이를 키우고, 회사 일에 치이며, 집은 언제나 돌아와 쉬는 장소일 뿐 삶을 들여다보는 공간은 아니었다. 혼자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가능할까.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 나는 집을 나섰다.


첫 근무지는 고향 부산이었다. 부산 톨게이트에 들어서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다 냄새와 매연, 젖은 흙냄새가 섞인, 어릴 적부터 무의식적으로 맡아왔던 냄새였다. 마치 오래 떨어져 있다 돌아온 아이를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어머니 품 같았다. 스무 해가 훌쩍 지났는데도, 몸은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부산에 내려와서는 옛 친구들을 자주 만났다. 술자리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젊은 날의 윤기는 사라지고 대신 주름과 흰머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도 자연스레 바뀌어 있었다. 누구는 정년을 채울 수 있을지 불안해했고, 누구는 정년 이후 무엇으로 먹고살지 고민하고 있었다. 골프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식 이야기로, 다시 건강 이야기로 흘러갔다. 웃으며 잔을 부딪쳤지만, 속으로는 서로의 얼굴에서 자기 모습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늙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처갓댁 근처 동래 명륜역 인근 오피스텔에 짐을 풀었다. 지하철 아래로 흐르는 온천천은 예전에 비해 눈에 띄게 맑아져 있었다. 물속에는 숭어 떼가 유유히 움직였고, 다리와 목이 긴 가마우지는 마네킹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청둥오리 무리들은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먹이를 찾느라 부산했다. 사람들은 천변 양쪽 길을 따라 걷거나 달리고 있었다. 이 길은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위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어디쯤에 서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주말 어느 날, 온천천을 따라 상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 두 정거장쯤 걸었을까, 내가 다녔던 대학교 역이 나왔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변했을까. 학교 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기억보다 넓어 보였다. 정문 앞에 늘 서 있던 시계탑은 을씨년스러워 보였고 정문 오른편에는 백화점 건물이 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배움의 공간과 소비의 공간이 아무렇지 않게 맞닿아 있는 모습이 어색했다. 세상은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지만, 가끔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것들도 있다.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다. 상과대학 건물을 한참 바라보다가,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강의 시작 전, 왁자지껄 떠들던 학우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학생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창 시절 비빔밥과 쇠고기국밥은 오백 원이었고, 튀김 가락국수는 삼백 원이었다. 늘 줄이 길었지만 불평하는 학생은 없었다. 지금은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메뉴도 훨씬 다양해졌다. 고기도 넉넉했고 상차림은 진수성찬에 가까웠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풍족해진 것과 함께 사라진 것은 무엇일지 잠시 생각했다.


회사 일에 치여 살던 시절에는 늘 목적지가 먼저였다. 본사와 해외를 오가며 일정표를 따라 움직였고, 길은 그저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 혼자 지내며 걷기 시작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회동 저수지와 부엉산에 올라 전망을 둘러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늘 곁에 있었지만, 마음을 두지 않으면 풍경은 풍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봄이 되어 청주로 부임했다. 부산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도시였다. 미호강이 잔잔히 흐르고, 고라니가 도로를 건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곳. 아내는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고 좋아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내려오고 올라갔다. 회사 덕분에 본의 아니게 주말 부부가 되었지만, 그래서인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더 선명해졌다. 헤어질 때는 아쉽고, 다시 만날 때는 반가웠다.


어느 날, 혼자 있는 방에서 문득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들여다보면 특별히 잘하는 것도,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 다만 고등학생 시절, 막연하게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실 앞에서 쉽게 접어두었던 마음이었다.


혼자 지낸 시간이 일 년을 넘기면서, 홀로서기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방 청소와 빨래는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내어 걷고, 읽고, 쓰는 일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공부하고, 사색하는 시간 속에서 같은 질문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아직도 그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예전처럼 바쁘다는 이유로 질문을 미뤄두지는 않게 되었다. 혼자 걷는 시간 속에서,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법을 조금은 배웠다. 어쩌면 그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는 하나의 답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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