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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준 Nov 19. 2023

우정의 무대

재회

복무했던 군부대인 9사단 사령부가 고양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울과 멀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부대에 비해 연예인들의 위문 공연이 잦은 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때 인기 방송 프로그램이었던 '우정의 무대' 첫 편도 여기서 한 것 같다. 당시 대통령이 9 사단장 출신이었고, 그의 아들도 이 부대에서 장교로 복무했었다.


위문 공연을 자주 온 연예인들은 혜은이, 문희옥, 김완선 등 주로 여자 가수였다. 한참 혈기왕성한 젊은 군인들을 배려한 방송국의 조치였을 것이다. 여자 가수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당대 최고의 댄스 가수인 김완선 양이었다. 나이도 우리와 비슷한 또래였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댄스와 함께 매혹적인 목소리로 장병들이 좋아할 만한 신선한 노래를 불렀다.


김완선 양이 위문 공연의 무대에 오르면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사령부 잔디밭에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던 예하부대의 장병들은 눈을 내리깔며 통제하는 헌병들도 무시한 채 전 군이 동일하게 추는 개다리 춤을 노래 장르와 무관하게 신나게 췄다. MC는 군인들의 영원한 형님, 뽀빠이 이상용 선생께서 주로 오셨다. 장병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듯 선생께서는 노련한 솜씨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장병들에게 그 순간만큼은 지상 천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의 간판 격인 수색대대와 정찰대의 신경전이었다. 당시 장병들은 옛날 군가에 나오는 밋밋한 푸른 군복을 입었는데 수색대원들만큼은 위장복 ( 일명 개구리 복)을 입었다. 체격이 좋은 수색대원들이 위장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같은 군인이지만 부러웠다. 반면 정찰대는 나중에 창설되었는데, 이 부대 훈련량이 수색대대 못지않았고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그래서 수색대대와 정찰대가 한자리에 있으면 늘 기싸움이 벌어졌다.


한날 위문 공연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두 부대원들의 격투기 싸움이 벌어졌다. 숫적으로는 수색대원들이 우세했지만 정찰대의 깡다구가 대단했다. 젊은 군인들이 전투화를 신고 이른바 패싸움을 벌이면 부상자가 속출한다. 특공무술인지 뭔지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며 싸우는 두 부대원들의 격렬한 몸짓은 단조로운 군대 생활 속에서 그야말로 볼 만했다.


싸움을 지켜보던 MC 이상용 선생의 낭랑한 멘트가 여전히 귀에 생생하다.


'늠름하게 뛰노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벅찬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조국은 장병들의 굳건한 기상에 안심하고, 생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마부대, 장병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백마!'


수색대대장에게 계급에서 밀린 정찰대장과 정찰대원들은 혼줄이 난 채 육공 트럭에 실려 떠났다. 잠시 후 위문 공연 행사는 재개되었고, 언제 싸움이 있었는지 장병들은 다 같이 개다리 춤을 다시 추기 시작했다.


이 십 년 세월이 흘러 하와이 지점장으로 근무할 때다. 하와이는 매년 대대적인 교포 행사를 한다. 행사를 할 때는 늘 한국에서 인기 있는 연예인을 모셔 온다. 항공사 지점장은 주로 행사의 마지막에 럭키드로를 추첨해서 항공권을 시상한다. 무대 단상에 서서 항공권을 시상하는 자리에서 이 십 년 만에 김완선 양을 만났다.


젊은 나이의 교포들은 당시 인기 있는 젊은 한국 연예인을 좋아했지만, 나는 추억의 위문공연에서 봤던 김완선 양만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심장이 너무 뛰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를 대표하는 지점장이니까 최대한 점잖게 행동해야 한다.


'저... 완선 씨! 오랜만입니다. 아마도 이십 년은 된 거 같아요. 그렇죠?'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아아, 결국 같이 사진 한 장 못 찍었다. 아내와 딸아이를 앞세워 떨리는 손으로 셔터만 눌러댔다.


사진 by  인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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