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비의 생일 선물
엄마 아빠는 희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비가 보기엔 그냥 희나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단 한번도 희나에게 TV 보는 걸 허락한 적 없었다.
자기들은 하하호호 매일 들여다보면서, 희나가 보고 싶다고 하면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희나를 매일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보냈다.
그래서 희나는 또래 아이들이 득시글한 놀이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희나의 친구들까지 참견했다.
이 친구는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사귀지 마, 그래서 희나는 좋아하는 친구들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떼를 쓸 만도 했다. 속상해서 울만도 했다.
그러나 희나는 울지 않았다.
울어도 소용없단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우는 희나보다 더 크게 악을 썼다.
그런 게 몇 백 번 몇 천 번 반복됐고, 결국 희나는 부모님 앞에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됐다.
하지만 울지 않는다고 슬프지도 않은 걸까?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비는 알고 있었다.
희나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지 못한 눈물이 고여 있다는 걸.
그렇게 눈물이 가슴에 계속 고여 있으면, 그 눈물은 마음 이곳저곳으로 스며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눈물이 스며든 곳이 쓰리고 아파진다.
계속 아플 수는 없으니까, 결국 언젠가는 고인 눈물을 흘려야했다.
그래서 희나도 가끔, 아주 가끔 고인 눈물을 남몰래 흘렸다.
모두가 잠든 밤, 혼자 침대에서 눈물을 흘렸다.
창문으로 파란 달빛이 들어오는 밤, 흐느끼는 소리가 나면 나비는 누구보다도 빨리 잠에서 깨어났다.
방에 째깍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울리고, 조그맣게 흐느끼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그러면 침대 끝에서 자고 있던 나비는 바스락 바스락 이불을 밟으면서 침대 머리 쪽으로 걸어갔다.
침대 머리 쪽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희나가 있다.
이불을 어깨 끝까지 덮고, 주먹 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다.
그럼 나비는 희나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차가운 코를 희나의 코에 마주 댔다.
코와 코를 마주 댄 채로 짜디짠 눈물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희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 우는 걸 멈추지도 않았다.
희나는 항상 참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희나도 나비 앞에선 우는 걸 참지 않았다.
나비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희나는 나비를 사랑했지만, 나비가 얼마나 영리한지는 알지 못했다.
나비가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 같은 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비 앞에선 눈물을 참지 않았다. 자신의 눈물이 나비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비는 희나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우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희나의 가슴께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희나는 나비가 잔다고만 생각했다. 나비는 잠꾸러기 고양이었으니까.
한참을 울던 희나는 어느 순간 느꼈다.
자신의 가슴으로 전해지는 작은 심장소리를, 부드러운 털의 감촉과 따스한 온기를 말이다.
그러면 희나는 우는 걸 멈췄다. 코를 훌쩍이며 숨을 가다듬고, 손을 뻗어 나비를 쓰다듬었다.
“나비. 착한 고양이 나비. 내 착한 고양이.”
그렇게 나비를 만지고 있다 보면, 희나는 아팠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걸 느꼈다.
아마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털이 정말 부드러워서 그랬을 터였다.
그렇게 나비를 쓰다듬다보면 마음속에 고인 눈물은 어느새 전부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사랑이 가득 차올랐다.
슬픔도 괴로움도 옅어지게 하는 사랑.
가슴 속에 사랑이 가득차면, 희나는 그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나비는 희나가 잠에 들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박자박 희나의 얼굴 앞까지 가서 맞은편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리곤 희나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봤다.
눈물 젖은 빨간 얼굴이 파란 달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어느 날 오후였다. 그 날은 다른 날답지 않게 집안이 아주 분주했다.
지글지글 돼지고기 굽는 냄새에 나비는 빨간 이불보 위에서 일어났다.
나비는 돼지고기를 좋아했다.
나비가 어렸을 때, 희나가 자기 밥그릇에 있는 돼지고기를 어른들 몰래 나비에게 집어주곤 했었다.
진한 기름 향기, 그 고소한 맛이란! 나비는 입맛을 쩝쩝 다시곤 주방으로 갔다.
“어휴. 바쁘다. 바빠.”
주방에선 엄마가 바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비는 그런 엄마 옆으로 다가가, 주방 서랍장 위에 두 발을 대고 섰다.
-야옹.
나비는 보채는 목소리로 울었다. 그제야 엄마는 나비가 거기에 있는지 알았다.
“나비. 안 돼. 이건 희나 생일 음식이라고.”
엄마는 허리에 손을 대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의 말에 나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나 생일이라고? 나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집 안이 다른 날과는 많이 달랐다.
벽에는 색종이 장식이 붙어 있었고, 거실에는 커다란 접이식 식탁이 나와 있었다.
식탁 위엔 케이크 상자도 있었다.
나비는 생일이 어떤 날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는 날이었다. 나비도 희나에게 매해 생일 선물을 받았다.
나비는 그동안 희나에게 받았던 많은 선물들을 떠올렸다.
맛있는 습식 캔도 있었고, 간질간질한 강아지풀 장난감도 있었고, 동글동글한 방석도 있었다.
하나같이 멋진 선물들이었다.
나비는 지금껏 희나의 생일에 한 번도 선물을 준 적이 없었다.
매해 생일 때마다 나비는 빈손을 민망해하며 희나에게 뽀뽀를 해주었을 뿐이었다.
물론 희나는 언제나 나비의 뽀뽀를 고맙게 받았었지만, 올해는 무언가 다른 걸 해주고 싶었다.
나비는 다각다각 조랑말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희나에게 무엇을 선물해주어야 할까? 어떤 멋진 선물이 있을까? 나
비는 킁킁킁 온 집안의 냄새를 맡으며 다녔다.
멋진 선물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나비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결국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무리 집안을 뒤져도 선물이 될 만한 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비가 한 시간 동안이나 집안을 뒤져서 찾아낸 것은 전부 다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뿐이었다.
소파 밑에서 힘겹게 끌어낸 건 아빠의 냄새나는 한 짝 양말이었다.
어휴. 냄새! 이런 걸 절대로 희나에게 줄 순 없었다.
나비는 그 양말을 소파 밑 깊숙한 곳에 도로 밀어 넣어 버렸다.
등산화 밑에서 발견한 뭉그러진 민들레 한 송이도 있었다.
조금 시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향기는 남아있었다.
나비는 신발 밑창 밖으로 나온 민들레 잎을 조심스레 잡아 당겼다.
하지만 당기던 중에 민들레 줄기가 뚝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것도 선물로 쓸 수는 없었다.
주방 바닥에 떨어진 검은콩 하나를 발견했을 땐 좋았다.
검은콩은 축구 놀이하기 그만이었다. 앞발로 탁 치면 슝 날아가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랐다.
나비는 조심스레 작은 앞니로 검은 콩을 잡았다. 그런데 이걸 어째?
희나 방으로 가는 중에 콩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어진 콩알은 바닥에 탁탁 튀더니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비는 너무 놀라서 몸의 털을 바짝 세우고는 콩알을 쫓아갔지만, 간발의 차로 콩알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콩알은 그대로 냉장고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나비는 제법 마음에 드는 선물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콩을 잃어버린 나비는 아주 낙심했다.
그 뒤로 찾아낸 물건들이 다 별 볼일 없었기에 더 그랬다.
비닐 조각이랑 종이 뭉치, 낡은 머리끈……. 다 흔하고 가치 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나비는 수염을 축 늘어뜨린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쩔 수 없이 올해도 뽀뽀를 선물해야할 것 같았다.
나비가 기운 없이 앉아있는데, 나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슉 지나갔다.
도대체 뭘까? 파리라도 들어온 걸까? 아니면 쌀벌레나 모기?
나비는 귀찮아하면서 파란 눈을 슬쩍 위로 굴렸다.
그런데 눈을 위로 굴린 순간, 나비는 믿을 수 없는 걸 봤다.
주황색 나비가 머리 위에서 날고 있었다!
집고양이가 되고 나선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비였다.
나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비가 보기에 저 주황색 나비보다 완벽한 생일 선물은 없었다.
나비는 주황색 나비를 쫓아 파다닥 뛰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꼭 여섯 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네 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가슴 속에서 활기가 솟아올랐다.
지금만은 열다섯 살 고양이가 아니라 여섯 살, 세 살 짜리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나비는 주황색 나비를 쫓아 이리저리 뛰었다.
하지만 주황색 나비는 잡았다 싶은 순간에 매번 나비의 손아귀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주황색 나비를 쫓던 나비는 어느새 가족 서재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주황색 나비는 팔랑팔랑 높은 천장으로 날아갔다.
나비가 아무리 용을 쓰고 뛰어 봐도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래도 나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비는 방안 책장 위로 펄쩍 펄쩍 뛰어 올라갔다.
서재에는 작은 책장, 중간 책장, 가장 높은 책장이 계단처럼 주르륵 놓여있기에 나비는 쉽게 가장 높은 책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주황색 나비는 전등 가까이에 붙어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비는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주황색 나비와 책장과의 거리를 눈어림으로 쟀다.
높이는 맞는데, 거리가 맞지 않았다.
주황색 나비는 나비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나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동동 발만 굴렀다.
이대로 포기해야하나?
한참을 기다리던 나비가 포기하려던 무렵, 갑자기 주황색 나비가 책장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비는 주황색 나비 쪽으로 손을 확 뻗었다.
휙 튀어나간 나비의 발톱 끝에 주황색 나비의 날개조각이 걸렸다.
그 순간, 나비는 발끝에 힘을 주어 발을 오므렸다. 드디어 주황색 나비가 잡혔다.
-야옹!
흥분한 나비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건 순간일 뿐이었다.
주황색 나비를 잡은 나비의 몸이 한순간에 앞으로 크게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나비는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뿔싸. 책장 밖으로 몸을 너무 많이 빼버리고 만 것이었다.
나비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비는 높은 책장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또 사람들은 고양이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바로 서서 착지한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균형을 못 잡고 다리가 아닌 다른 곳 먼저 떨어지는 고양이들도 많았다. 오늘의 나비도 그랬다.
나비는 주황색 나비를 꼭 잡고 있느라 제때 균형을 잡지 못했다. 나비는 어깨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의자 바퀴에 머리를 크게 찧고 말았다.
정말 눈물이 줄줄 나올 정도로 아팠다.
나비의 눈앞이 하얗고 까맣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비는 곧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비는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어린이들이 떠드는 소리 중 간간이 희나의 목소리도 들렸다.
희나는 나비를 찾고 있었다.
“엄마. 나비는 어디에 있어요?”
“글쎄. 고기를 훔쳐 먹으려고 하기에 한마디 했었는데. 삐져서 어디에 숨어있나?”
“그래도 이상해. 내가 오면 항상 마중 나왔는데.”
나비는 비틀거리면서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비는 머리를 흔들며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다.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나비는 자기 발에 묻은 이상한 가루를 발견했다.
주황색 가루였다. 그 가루를 본 순간, 나비는 모든 것이 기억났다.
주황색 나비를 잡으러 서재에 들어온 것도, 높은 책장에서 떨어진 것도 말이다.
나비는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힘들게 붙잡은 주황색 나비는 나비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나비는 얼른 그 주황색 나비를 주워 조심스럽게 입에 물었다.
머리가 좀 아프고 어깨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비는 서둘러 서재 밖으로 나갔다. 내딛는 발걸음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누군가 눈치 챌 정도는 아니었다.
-야옹.
밖에 나간 나비는 바닥에 주황색 나비를 내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희나를 불렀다.
희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비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비야!”
희나가 웃으며 나비에게로 다가왔다.
희나가 나비에게로 손을 뻗자, 나비는 평소처럼 안기는 대신 그 손을 살짝 물었다.
희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옹.
나비는 희나의 손을 그대로 바닥에 있는 주황색 나비 쪽으로 끌고 갔다.
희나는 그제야 나비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비 앞에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나비. 누가 봐도 선물을 준비했다는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놀람과 기쁨이 희나의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나비야! 나한테 생일 선물을 가져다 준 거야?”
-야옹.
나비는 희나의 말에 가슴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나는 기뻐서 나비의 이마에 뽀뽀를 쪽 해주었다.
비록 죽은 나비는 가여웠지만, 나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였다.
가르릉 거리며 자랑스러워하는 고양이에게 누가 화를 낼 수가 있을까?
희나는 주황색 나비를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싸서 보관한 뒤, 나비와 함께 생일잔치가 열리는 거실로 갔다.
나비와 희나는 친구들과 함께 생일잔치를 즐겼다.
그날은 나비와 희나 둘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나비와 희나는 함께 행복한 생일을 즐겼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날이었기에, 둘 모두 오늘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