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비와 희나
나비는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였다.
단추 같은 분홍 코와 쫑긋한 뾰족귀도 가지고 있었다.
볕이 좋은 날엔 나비는 작은 방의 빨간 침대보 위에서 잤다. 흐린 날도, 비가 오는 날도, 천둥이 치는 날에도 계속해서 잤다.
나비는 나이든 고양이라 이젠 거의 놀지 않았다.
]거실이나 주방을 뛰어다니는 대신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 아빠는 나비는 잠꾸러기라고 놀렸다.
엄마 아빠가 놀리면 나비는 야옹하고 말대꾸했지만, 사실 딱히 그 말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잠꾸러기 나비도 매일 잠만 자는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 희나가 돌아오는 시간에는 나비도 파란 눈을 반짝 뜨고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사랑스러운 희나. 나비의 친구.
저 멀리 슥슥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면, 나비는 빨간 이불보에서 벌떡 일어나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 앞에 서서 철컥 소리가 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면 나비는 너무나도 행복해졌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뛰어나가 희나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희나의 옷자락에 꼬리를 감았다.
-어서와, 어서와. 희나.
그러면 희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헤헤 웃으며 나비를 들어 올렸다. 나
비가 아프지 않게 엉덩이를 잘 받쳐 끌어안고, 나비의 코에 쪽 입을 맞추어 주었다.
“나비. 많이 기다렸지?”
희나가 나비를 달래면 나비는 일부러 더 크게 울었다.
나비와 희나는 마치 탁구를 하듯 서로를 향해 야옹거리곤 했다.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그건 나비와 희나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였다.
어른들은 말도 안통하면서 왜 그렇게 떠드느냐고 물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비와 희나는 야옹거리면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몰랐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통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새로운 강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강아지는 아주 특별한 강아지라고 했다.
영국에서 온 귀족 개라나 뭐라나. 아빠 직장 상사에게 받아오기로 한 거였다.
아빠는 매일 같이 그 개의 가격을 말했고, 엄마도 새끼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울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비는 새로 올 강아지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물론 강아지가 오면 희나와 어울릴 시간이 좀 줄어들겠지만, 이 참에 희나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기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생각은 좀 달랐다.
엄마 아빠는 나비 때문에 강아지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다.
“나비 때문에 새로 오는 강아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떡하지? 나비가 강아지를 할퀴거나, 강아지가 나비를 물면 어떡하냔 말이야. 개랑 고양이가 앙숙이란 말이 괜히 있겠어?”
“어쩌면 나비를 시골에 보내는 게 좋을지도 몰라.”
엄마 아빠가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면 희나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나비를 꼭 끌어안았다.
그럴때마다 나비는 자기를 꼭 껴안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비는 절대 못 보내! 나비는 금방 차에 치여 버리고 말거라고.”
나비는 시골에 가는 게 무섭지 않았지만, 희나가 자기 편을 들어줄 때마다 기뻤다.
세상에 나비의 편을 들어주는 건 늘 희나밖에 없었다.
희나가 너무 질색했기에, 부모님은 나비를 시골에 보내겠단 말을 금방 그만두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포기한 건 아니었다.
나비는 어두운 밤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부모님이 안방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괜찮아. 나비도 올해로 15살이니까. 어쩌면 금방 해결될지도 몰라…….”
나비는 영리한 고양이였다. 그래서 씁쓸하게도 엄마와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5살.
고양이로서는 충분한 세월을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나비의 형제자매 중에 나비만큼 오래 산 고양이는 없을 터였다.
길고양이였던 나비는 운 좋게 희나의 집에 들어와 이렇게 오래오래 많은 계절을 살았다.
씁쓸했지만 슬프진 않았다. 나비는 모든 건 언젠가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꽃은 지고, 계절은 변하고, 매일 태양은 산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 어떤 예외도 없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나비는 언젠가 자신이 영원히 눈을 감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나비의 시간이 다 끝나버리면, 혼자 남은 희나는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