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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이 Jul 24. 2021

기괴하고~- 5. 야근러는 퇴직이 하고 싶어

어젯밤,  옆 부서의 김경애 사원이 죽었습니다.

<야근러는 퇴직이 하고 싶어>




어젯밤,


옆 부서의 김경애 사원이 죽었습니다.




옆 부서 최부장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사원들에게 우연한 심장마비였다고 변명했지만, 모두들 진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사실 과로사를 한거랍니다.


최근에 너무 무리한다는 생각은 했었죠.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열심히 하라며 응원했었죠. 그녀는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1분기에 정규직 전환을 앞두던 사원 한명이 잘리는 일이 있었거든요. 회사는 그녀의 업무태만을 해고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잘린 사원은 일을 잘 하진 못했지만, 그렇게까지 게으르진 않았거든요. 그럭저럭 일하는, 그렇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내지 못하는 그런 평범한 사원이었었죠.


이런 상황에서 김경애씨에게 무슨 선택지가 있었겠어요? 김경애씨는 ‘김경애씨는 다르다’, ‘이대로만 하면 반드시 정규직 전환시켜준다’는 사측의 말을 덮어놓고 믿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잘리지 않기 위해,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다가, 결국 다그닥거리는 기계식 키보드 위에 이마를 박은 채 명을 달리하고 말았답니다.




김경애씨의 죽음은 인터넷 뉴스에도 났고,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기사가 옮겨져 알려지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답니다. 김경애씨의 사건은 그렇게 반짝 화제가 되었다가 금방 잊히게 되었죠. 사실 김경애씨 말고도 매일 과로사로 죽는 사람은 많으니까요.


아무튼 그 사건 이후에 회사는 조금 조심하는 듯 했어요. 야근도 시키지 않고, 퇴근도 제 시간에 꼬박 꼬박 시켜주었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잠깐 뿐이었어요. 김경애씨의 죽음 이후 한 달이 지나자, 회사는 다시 슬금슬금 우리에게 야근을 시키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요. 회사는 다시 야근을 시작했지요. 먼저 김경애씨와 다른 층의 부서들 먼저 야근을 시작하고, 그다음엔 같은 층에서 가장 먼 부서가, 그 다음엔 김경애씨 부서 바로 옆 부서가 야근을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김경애씨의 부서가 야근을 다시 시작한 날, 회사는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어요.




그게 말이에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죽은 김경애씨가 다시 회사에 나타났거든요.




김경애씨는 야근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자기 자리에 나타났어요. 물론 이제 자기 자리는 아니죠. 회사는 얼마 전 신입사원에게 그 자리를 줘버렸으니까요. 그런데 그 신입사원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지 뭐예요?


김경애씨는 살아있을 때와 많이 달라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안색은 창백했고, 두 다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리가 보이지 않는 귀신이라니. 어쩌면 클래식한 귀신의 모습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모두가 깜짝 놀라고 겁에 질렸어요.


그중에서도 자리를 빼앗긴 신입사원은, 가엾게도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회사 그만두고 싶다.”


“어휴. 진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진짜 미쳤다, 진짜…….”


사원들은 수군거렸지요. 사원들이 이렇게 수군거리면 보통 경영진들은 사원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어요. 왜냐면 그날 경영진들도 김경애씨를 봤거든요. 경영진들은 패닉에 빠져 날뛰느라고 사원들 입단속을 전혀 시키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김경애씨 부서에만 돌던 목격담은 금세 온회사로 퍼져나갔지요. 그리고 그게 바로 옆 부서에서 근무하는 제가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답니다.


아무튼 경영진들은 김경애씨를 어떻게든 쫓아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김경애씨가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엔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답니다. 무당에, 신부님에, 도사에, 프리랜서 엑소시스트까지. 회사는 십 수 명의 영능력자에게 수천만원의 돈을 썼지요. 그렇지만 그 누구도 김경애씨를 쫓아내진 못했답니다. 김경애씨는 그들이 자신에게 술을 뿌리고 성수를 뿌리고 뭔 이상한 허브 가루 같은 걸 뿌리는 동안 그저 조용히,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어요.


웃기지 않나요?


김경애씨를 쫓아내려고 고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회사는 돌아가고 있었다는 게. 회사는 이미 너무 많은 손해를 봐서 정상운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김경애씨 자리에서 방울을 울리는 동안,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은 컴퓨터로 야근을 했어요. 그렇게 방울이 울리고 무속인들이 악을 쓰는 나날이 반복되었죠. 그러는 동안, 우리들은 그만 김경애씨의 귀환에 적응해버리고 말았답니다.


그게 말이에요. 솔직히 시끄럽게 꽥꽥대면서 무능한 무속인들보다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귀신 김경애씨가 더 호감이잖아요. 우리는 점점 왜 굳이 김경애씨를 굿까지 해서 쫓아내야하는지 알 수 없어졌어요. 어차피 그런 거 해봤자 가지도 않는데. 그리고 그건 경영진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어요. 김경애씨가 무해하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냥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경영진은 어느 순간부터 무속인을 부르는 걸 그만두었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김경애씨와 같이 야근을 하게 되었답니다.


다리 없는 김경애씨는 그렇게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 녹아들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저는 야근에 앞서 연료로 쓰일 더블 샷 라테를 사서 사무실에 돌아가는 중이었죠. 사무실 복도에 도착했는데, 어째선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죠. 사람들은 김경애씨 부서 앞에 모여 있었어요. 그리고 그 무리들의 앞에는 황금식 대리가 서 있었고요. 황금식 대리가 누구냐고요? 저와 부서는 다르지만,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랍니다.


흔히 말하는 관종이거든요.


“금식씨. 하지 마.”


“괜히 건드려서 동티나면 어떡해.”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김경애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합류한 저는 황금식씨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지요. 저는 황금식씨와는 완전히 다른 타입의 인간이었거든요. 불필요한 관심을 끌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속으로만 궁금해 했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황금식씨. 왜 지금 김경애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황금식씨는 우리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황금식씨는 마치 비장의 무언가를 꺼내드는 것처럼 오른손을 척 들어 올렸어요. 하지만 뭐 대단한 걸 들어올린 건 아니었답니다. 그의 오른손엔 평범한 서류철이 들려있었죠. 그는 마치 마술사가 마술도구를 보이는 것처럼 그 서류철을 보여준 뒤, 몸을 척 돌려 척척척 사무실 안으로 돌아갔답니다.


저는 황금식씨가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때마다 입을 조금씩 벌릴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고요? 황금식씨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의 의도가 점점 더 명확해졌기 때문이죠. 저는 혼란과 당황 속에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어요.


진심이야? 황금식씨? 진짜? 진담이야? 농담이지?


황금식씨는 서류철을 들고 가만히 앉아있는 김경애씨에게 가고 있었어요. 그가 김경애씨에게 가까워질수록, 저는 속으로 제 추측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하지만 결국, 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답니다.


“부, 부탁드립니다.”


김경애씨 앞에 도착한 황금식씨는, 그래도 좀 무섭긴 했는지 기죽은 모습으로 김경애씨에게 서류철을 넘겼어요. 물론 김경애씨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황금식씨는 김경애씨가 서류철을 받지 않자, 김경애씨의 책상 위에 서류철을 올려놓은 뒤에 백스텝으로 호다닥 도망쳐 버렸어요.




미친 거 아니에요?




저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황금식씨가 서류철을 내려놓는 순간, 저는 제 안에 있던 모든 인류애가 사그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요? 야근하다 죽은 김경애씨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다니. 염치도 동정도 없는 파렴치한 짓이었어요. 그의 행동에 혐오와 경멸이 치밀었지요.


저는 황금식씨를 비난하기 위해 검지를 세운 채 오른 손을 쳐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막상 그를 비난하진 못했지요. 그저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고, 손을 다시 내릴 뿐이었어요. 제가 마지막 순간에 겁이 났다거나, 그냥 봐주자고 마음을 바꾼 건 아니었어요. 그저 당장 황금식씨를 비난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 생기고 만 거죠.


-팔락,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에,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굳어버렸어요.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요? 김경애씨가 황금식씨가 두고 간 서류철을 살펴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동안 옆에서 무슨 일을 하던 꼼짝도 않던 경애씨가 움직이다니. 그건 정말 충격과 공포였지요. 충격과 공포…….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


“컥.”


굳어있던 우리들은, 누군가가 코가 막힌 듯 컥 크게 숨을 들이쉬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요. 우리들은 뒤늦게 갓 깨어난 거미새끼처럼 파드닥 사방으로 퍼져 도망쳐버렸답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김경애씨가 처음으로 움직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회사는 불안하게 술렁이고 있었죠. 황금식씨 때문에 괜히 동티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지요. 모두가 무서워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사원들이 황금식씨를 재촉해서 다시 김경애씨를 보러 가게 했습니다. 황금식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사무실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모두가 무서워서 도망쳐버린 김경애씨의 사무실로 말이죠.


우리는 복도 끝에 모여 황금식씨가 비척비척 사무실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무실 복도에서 머뭇거리다가 문으로 고개를 쓱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요. 우리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튀어 도망갈 준비를 하고 황금식씨를 유심히 관찰했죠.




도대체 저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안을 들여다 본 황금식씨가 어깨를 흠칫 떠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들의 어깨도 같이 흠칫 떨렸지요. 그리고 황금식씨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문 안쪽으로 조금 더 집어넣었어요. 그렇게 20여초 간 안을 살펴본 황금식씨는 다시 사무실 밖으로 고개를 쑥 빼고는 후닥닥 우리들을 향해 달려왔답니다.




“김경애씨가, 김경애씨가…….”


우리 앞에 선 황금식씨는 헐떡이면서 목소리를 떨었어요. 우리들은 콧구멍에 바람을 힘껏 넣으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죠. 그리고 마침내 황금식씨가 꽤액 소리를 지르며 우리가 기다리던 말을 했답니다.


“액세스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제가 준 야근 말이에요. 그걸 하고 있다고요!”


예? 액세스요?


황금식씨의 말에 모두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어요. 우리들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황금식씨가 그랬던 것처럼 비척비척 김경애씨의 사무실 앞까지 걸어갔어요. 그리고 사무실 문 안으로 머리를 넣어 김경애씨를 훔쳐보았답니다.


우스운 일인지, 무서운 일인지.


새하얀 얼굴의 김경애씨는 정말 액세스 작업을 하고 있었답니다.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 찼던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어요.


우리들은 늘 그랬듯이 퇴근했다가 잠깐 자고 다시 출근했답니다. 그날 야근 했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출근하자마자 김경애씨의 자리를 확인했어요.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요.


김경애씨의 자리는? 언제나 그렇듯 아침 시간 김경애씨의 자리는 비어있었답니다. 그녀는 야근 시간에만 나타나는 귀신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빈자리에, 평소엔 보이지 않던 물건이 하나 올려져 있었어요.


노란 색의 네모 납작한-, 그건 바로 황금식씨가 김경애씨에게 넘긴 서류철이었답니다.


믿겨지시나요? 서류철뿐만이 아니었어요. 서류철 위엔 황금식씨의 usb가 올려져 있었고, 황금식씨가 확인해본 바론 그 안엔 야근 서류가 예쁘게 저장되어 있기까지 했다네요. 물론 황금식씨가 usb까지 주진 않았죠. 대신 황금식씨 서랍에서 usb가 하나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김경애씨가 usb까지 가져다가 서류를 저장해준 거예요.


회사는 다시금 수군수군 술렁술렁 댔어요. 거의 김경애씨가 귀신이 돼서 다시 나타났었던 때만큼 술렁댔던 것 같아요.


김경애씨가 야근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황금식씨를 비난했답니다. 김경애씨를 동정하기도 했어요. 당연하고 지당한 반응들이죠. 그런데 사흘이 지나자 상황이 조금 묘하게 바뀌었답니다.


한 명의 사원이 황금식씨를 따라 자기 야근을 김경애씨에게 떠넘긴 것이었어요. 그건 부끄러움을 모르는 창피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황금식씨 때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묘하게 두 번째 사람을 비난하는데 소극적이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되자 두 명의 사원이 김경애씨에게 또 야근을 떠넘겼답니다.


두 명이 세 명이 되고 세 명이 네 명이 되고, 네 명이 여덟 명이 되고…….


결국은 십 수 명의 사람들이 김경애씨에게 야근을 떠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경애씨에게 야근을 떠넘겨도, 끝까지 야근을 떠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답니다.


죽은 사람에게 야근을 떠넘기는 건 비열한 짓이었어요. 제가 도덕에 너무 민감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저는 사람들의 그런 행태를 용납할 수가 없었어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야근을 떠넘기는 것도 못할 짓인데, 하물며 죽은 사람에겐 더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결국 저는 기다림에 지쳐 직접 사람들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정말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근하다 잘못된 동료한테. 정말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사람들은 다들 제 말에 곤란해 했어요. 어떤 사람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한번만 봐줘’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정색하며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남들 다하는데 어때’라며 가볍게 대꾸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다들 제 말을 회피하기 바빴지,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점심시간 저와 주임님은 옥상 정원에 올라와 있었어요. 옥상엔 저희 말고 다른 직원들도 삼삼오오 모여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저를 보곤 모두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옥상에서 퇴장했답니다. 아마도 제가 또 김경애씨에게 야근 떠넘기지 말라고 할까봐 부담스러웠나봐요. 옥상정원에 저와 주임님만 남자, 주임님은 주머니에서 저를 향해 질색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셨어요.


“야. 사람들 설득하고 다닌다며? 너 그것 좀 하지 마.”


저는 눈을 크게 뜨고 주임님을 쳐다보았죠. 왜냐면 지금껏 주임님에겐 설득의 ‘설’자도 꺼내지 않았거든요. 주임님과 저는 김경애씨에게 야근을 떠넘기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저는 주임님이 어떻게 제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니는 걸 알았는지 당황스럽고 궁금했어요.


“너 뒷말 나오고 있거든. 다들 너 재수 없다고 생각한대.”


“어머. 그래요?”


“어머가 아니지, 어머가. 원망사서 좋을 일 없으니까 당장 그만 두라고.”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그리고 어차피 말로는 절대 안돼. 도리고 뭐고, 당장 편한데 누가 그걸 그만두겠냐.”


주임님은 긴 한숨을 내쉬며 상의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담뱃갑을 꺼내셨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꺼내시고도 바로 불을 붙이지는 않으셨지요. 주임님은 담뱃대를 든 채 왠지 씁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셨어요.


“그냥 포기해. 넌 사람들 절대 못 말려. 정말 말리려면 네가 직접 김경애씨 앞에 막고 서서 일 못 넘기게 하던가, 아니면 직접 소금이라도 뿌리면서 춤이라도 출 수 밖에 없어. 너 그럴 거야? 정말 그럴 거야?”


주임님의 말에 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어요. 사람들을 막고는 싶었지만, 주임님의 말대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막을 자신을 없었거든요. 제가 망설이는 것을 본 주임님이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쓰게 입맛을 다시셨답니다.


“그리고 네가 정말 뭐라도 할라치면, 야근 넘기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주임님은 드디어 담뱃불에 불을 붙이셨어요. 칫- 소리와 함께 불이 붙는 순간, 저는 가만히 그 순간을 바라보았지요. 예전이라면 군침이 꼴딱꼴딱 넘어갔겠지만, 담배를 끊은 지도 벌써 2년째. 이젠 담배를 보면 약간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 뿐이었어요.


주임님은 담배를 길게 들이마셨어요. 주임님이 숨을 들이킬 때, 담뱃불이 빨갛게 빛이 났지요. 주임님은 길게 들이마신 숨을 후-, 하늘을 향해 또 길게 뱉으셨지요. 주임님은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말을 망설이시는 듯하셨어요. 저는 일부러 재촉하진 않았지요. 하실 말이라면 하시고, 아니라면 안하시겠지요. 담배가 엄지 손톱만치 타들어갔을 때, 주임님은 드디어 가래낀 말을 꺼내셨답니다.


“그냥 다들, 김경애씨처럼은 되고 싶진 않아서 그러는 거야.”


저는 주임님을 말없이 바라봤지요. 당장은 주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다들, 그냥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하지만 곧 알아들을 수 있었지요. 뎅-, 무언가가 머리를 뎅-하고 치는 것 같았어요. 주임님의 담담한 목소리가 제겐 적잖은 충격이었지요. 주임님은 다시 담배를 무시고, 불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셨어요.


“오늘은 나도 김경애씨한테 야근 떠넘기려고.”


저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주임님을 바라봤어요. 주임님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지으셨답니다.


“드럽지?”


“아니, 그런 건 아니…….”


저는 황급하게 변명하려고 했지만, 주임님은 제 변명을 그다지 듣고 싶지 않으신 것 같으셨어요. 주임님은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말을 막으셨답니다.


“아닌 척 말아. 나도 이러는 내가 드럽다고 생각하니까. 근데 오늘 우리 딸랑구 생일이다. 평소에 잘해주지도 못하는데, 오늘만큼은 일찍 퇴근해야하지 않겠어?”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요. 끄덕끄덕. 열과 성을 다했지요. 마치 단 한 번도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을 비난한 적 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어요. 이 순간 제가 미친 에프엠주의자에 꼴통처럼 느껴졌지만요. 왜 전 주임님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상쾌하고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걸까요?


“야.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진 않다. 근데, 나도, 살고 싶다.”


“주임님…….”


“한 대 피워.”


“주임님 저…….”


저 담배 끊었어요. 평소라면 그렇게 대답했겠죠. 그런데 오늘은 그 대꾸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넘어오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쓴웃음을 지으며 주임님에게 담배 한 대를 받았답니다. 주임님은 제게 불도 빌려주셨어요. 담뱃대에 불을 칫 붙이자, 주임님은 조금 계시다가 ‘그럼 먼저 들어간다’라며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셨답니다.


어느새 옥상정원에는 저 혼자밖에 남지 않았죠.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어요. 담뱃불은 점점 타 들어가는데, 저는 좀처럼 한 숨도 들이키지 못하고 있었지요. 힘들게 끊은 담배라 다시 입에 대는 것이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두려움보다도. 왜인지 당장은, 당장은 정말 한 대 피우고 싶더라고요.


저는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담뱃대를 입술로 적셨답니다. 첫입을 들이키는 순간, 가슴에 남아있던 죄책감 때문인지 첫입은 저도 모르게 겉담배만 피우고 말았어요. 불쾌하고 매캐한 악취가 입 안에 가득차고, 목구멍을 매운 침이 걸리는 바람에 저는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쿨럭쿨럭. 퀘엑퀘엑.


눈에 눈물이 고이고, 짜증스런 기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어요. 담배 한 대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사진 한 번 본 주임님의 딸이랑, 제가 요새 뭐라고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랑, 맨 처음 김경애씨에게 서류를 넘기던 황금식씨의 떨리던 손끝 같은 것들…….


그런데 사실, 그 많고 많은 생각은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생각이었답니다.


참…….


사는 게 참 족같다는 생각이요.


주임님의 말 덕분에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모두 살고 싶어서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요.


그래요. 모두 살고 싶겠죠. 김경애처럼 일하다 죽고 싶진 않았을 것이고, 퇴근 후 조금의 휴식이나 취미 생활도 누리고 싶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회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에게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고……. 그냥 모두, 살고 싶어서. 살아가야 하니까. 타인에게 어떤 불행이 있던, 심지어 나 자신에게 어떤 불행이 찾아오던,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저는 담배를 다시 빨았어요. 이번에는 깊게 빨아들였죠. 탁한 연기가 제 폐부를 쓸고 나갈 때, 나는 온몸의 힘이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을 느꼈어요. 머리가 멍해지고, 시야가 잠깐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저는 참 더럽고 바닥 같은 기분을 느꼈답니다.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찝찝한 기분과 참담한 죄책감밖에 느껴지지 않았어요.


저는 조금 울고 싶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울진 않았지요. 안구건조증이라 눈물이 다 메말라버렸거든요. 저는 그냥 남은 담배를 뻑뻑 피우며 김경애씨에 대해 생각했어요.


죽어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그녀를, 그리고 그 키보드 위에서 머리를 떨어뜨렸을 때의 그녀를 생각했답니다. 모두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전……. 전 김경애씨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답니다.


있잖아요. 우리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살아야하니까요.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김경애씨는요? 김경애씨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그녀는 더는 고통 받지 않아도 괜찮은 거잖아요.


저는 소심한 비겁자였어요. 김경애씨를 동정했지만,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울 용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녀를 돕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편리를 방해하는 것이었고, 그건 마치 제가 그 사람들 삶의 희망과 열망을 멋대로 저급한 것으로 재단하고, 방해하는 것 같이만 느껴졌어요.


그래서 결국 저는……. 소심한 비겁자다운 선택을 하고 말았답니다.




타닥타닥.


김경애씨가 타이핑을 하는 소리가 우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어요.


가끔은 딸각딸각하는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도 났죠.




저는 가까운 파티션 뒤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봤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된 다음엔, 그녀를 보며 옷매무새도 정리했답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다 정리한 다음엔 교차한 두 팔로 가슴을 꾹 누르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답니다.


“저것 봐.”


누군가 제 뒤에 대고 소곤거렸어요.


“잘난 척 하더니. 결국 지도 똑같은 짓하네.”


저는 그 소리가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 물론 아예 안 아팠다면 거짓말이고요. 조금 따끔하긴 했죠.


토각, 토각. 발걸음 소리가 제 몸을 어느 정도 울린 다음, 저는 드디어 김경애씨의 앞에 도착했어요. 김경애씨는 데스크톱의 화면에 창백한 얼굴을 고정하고 있었지요. 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킨 뒤, 김경애씨를 향해 허리를 푹 숙이며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저는 팔과 가슴 사이에 끼고 있던 파란 서류철을 김경애씨에게 건넸습니다.




김경애씨는 모두의 서류를 차별 없이 돌보아 주었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양이던, 얼마나 복잡한 양이던, 접수순으로 처리해 주었어요. 그렇지만 제 서류는 달랐답니다. 김경애씨는 며칠이 지나도 제 서류를 돌려주지 않았죠. 아주 복잡한 일이었냐고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니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잡다한 일이었냐고요? 아니요.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김경애씨는 제 일을 돌려주지 않았죠. 김경애씨는 저의 파란 서류철을 책상 한 켠에 두고, 일할 때마다 한 두 번씩 펼쳐보았습니다. 매일 매일 한 두 번씩이요. 하지만 그걸 눈치챈 건 온회사에 저뿐이 없었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야근 시간이 되자 김경애씨는 나타났습니다. 김경애씨의 자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이지요. 늘 그렇듯 누군가가 다 못한 일을 떠넘기려고 김경애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지요. 그동안 누가 일을 넘기던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던 김경애씨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었어요.


드르륵, 의자가 밀리고 그녀가 일어난 순간, 일을 떠넘기려던 직원은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답니다. ‘끄악!’하는 멋없는 비명이 울렸지만, 김경애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김경애씨는 넘어진 사람을 지나쳐 또각 또각 걸어갔답니다. 물론 발소리는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녀의 치맛단이 조그맣게 살랑일 때마다 우리는 그녀의 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렇게 걸어간 그녀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하나 꺼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파티션 뒤에 숨어 동그란 눈으로 그 봉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그 봉투에는,


「사직서」


라는 글자가 프린트 되어 있었거든요.


김경애씨는 그 얇은 봉투를 부장님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품에서 무슨 종이 한 장을 꺼내 가슴에 꼭 끌어안았지요. 그리고, 그리고…….


열린 창문 너머로 또각또각 걸어나가버렸답니다.


그녀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질 때,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창문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뛰어가서 창문에 매달린 채, 공중을 걷고 있는 김경애씨를 바라보았지요. 김경애씨는 흐늘흐늘, 흐늘흐늘 춤을 추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면서…….


멀고 먼 구름 너머로 뛰어가 버렸답니다.




우리는 모두 입을 벌리고 있었지요. 지금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곧 현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왜냐면, 곧 퍼벙퍼벙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사무실에 크게 울리기 시작했거든요.


퍼벙퍼벙. 퍼벙퍼벙.


데스크톱 본체 안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기겁해서 자기 자리로 뛰어갔죠.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 김경애씨에게 일을 맡겼던 사람들의 컴퓨터가 하나도 남김없이 터져버리는 일이 있었답니다. 누구의 컴퓨터가 터졌는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의 컴퓨터가 터졌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데이터 복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경애씨가 떠난 이후 한 달간, 온 회사 사람들이 모두 사이좋게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습니다.


저는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빨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누가 저를 부르더니, 제게 엽서가 왔다는 겁니다. 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엽서를 받았습니다. 그건 와이키키 해변의 사진 엽서였는데, 뒷면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답니다. 하얀 엽서. 보낸 사람 이름도 없고, 그냥 제 이름과 부서만 덜렁 쓰여 있었지요.


저는 처음엔 이게 뭔지 모르고 있다가, 곧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답니다. 저는 당황했지요. 하지만 예상외로, 그렇게 당황하진 않았답니다. 저는 엽서의 야자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책상 서랍에서 파란 서류철을 꺼냈어요.


저는 서류철을 열었습니다. 서류철 안에는 회사의 흑백 서류대신, 색색깔의 광고지들이 철되어 있었답니다. 그 사이엔 몇 종류의 사직서 양식이 끼어있었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진 않았고……. 중요한 것은 많이 매만진 듯 구겨진 여행 광고지들이었지요.


몰디브 여행 광고지, 그리스 여행 광고지, 일본 여행 광고지…….


그리고 그 중엔 찢어져 윗부분만 남은 광고지도 있었지요. 그건 바로 하와이 여행 광고지였답니다. 제 기억으론 와이키키의 해변 사진이 들어가 있었지요. 저는 광고지가 찢어진 자리에 와이키키 엽서를 끼워놓았답니다.


서류철을 닫은 후, 저는 어디선가 시원한 바닷소리와 느긋한 휴양지의 음악이 들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지금쯤 김경애씨는 하얀 해변에서 코코넛 음료를 마시고 있을까요? 제 일도 아닌데도, 저는 어쩐지 조금 행복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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